그리운 악마/이수익 숨겨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들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 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 詩가 흐르는 상자 2010.11.11
허락된 과식/나희덕 허락된 과식 나희덕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햇빛이 가득한 건 근래 보기 드문 일 오랜 허기를 채우려고 맨발 몇이 봄날 오후 산자락에 누워 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햇빛을 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 핣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 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8.07
이사/ 김나영 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8.07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정현종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7.29
폭설/오탁번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5.09
비스듬히/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정현종 시인의 시「비스듬히」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5.05
고독/이해인 고독-이해인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말을 하지만 연륜과 깊이를 더해갈수록 말은 차츰 줄어들고 조금은 물러나서 고독을 즐길 줄도 아는 하나의 섬이 된다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4.11
수선화에게/정호승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무가지..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4.07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金春洙(1922 ~ 2004)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數千 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3.22
아침 식사/ 쟈끄 쁘레베르 찻잔 안에 커피 따르고 커피잔 안에다 밀크를 치고 밀크 친 잔에 설탕을 넣고 티스픈으로 휘휘 저어서 그는 마시데요 찻잔을 놓고 내겐 말 없이 담배를 한대 붙여 물더니 담배 연기로 원을 그리고 재떨이 안에 재를 떨고 내겐 말 없이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나데요 그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비옷을 .. 詩가 흐르는 상자 2010.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