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겨울노래

tlsdkssk 2010. 11. 5. 07:06

겨울노래

가을이 사색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깊은 상념의 계절인가. 서둘러 지나가려는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으려 혼자 산행을 하던 날, 가파른 길에서 땅만 보며 오르다가 낙엽송 한 그루를 올려다 본 것은 소복이 떨어져 쌓인 금침 같은 잎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노란색으로 물들어 떨어진 그 침엽수 잎들은 여느 낙엽들보다 더 가을을 실감케 하였고, 투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텅 빈 가지들을 추스르고 선 그 큰 나무에게서 나는 겨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은 깊은 상념의 계절임을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의 병은 여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병명을 확인하여 입원한 것은 늦가을이다. 그 과정을 알고 보면 ‘사람의 일이란 도무지 측량할 도리가 없도다.’라고 한 회남자(匯南子)의 인간훈(人間訓) ‘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6월에 직장에서 받게 하는 종합건강진단 결과 무병 판정을 받은 것이 결과적으로는 친구에게 방심의 기회를 준 것, 그것이 복지위화(福之爲禍)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운동량이 부족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50세의 직장인에게 그 두 가지를 대체로 다 해결해준다고 할 수 있는 골프에 입문하여 심취하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복지위화가 된 것이다. 말복이 지난 어느 날 라운드를 함께 하면서 그가 말했었다. “2개월간 노사분규를 협상하면서 새벽에 연습장에 나간 것이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었어. 하지만 혁대 구멍이 두개나 줄었네….” 급격한 체중감소를 의심하면서도 국영기업체의 임원으로서 더 높은 직위로 승진 발령을 받은 10월의 경사는 그의 병에 있어 복지위화의 연속이었다.

무균실(無菌室)이라는,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그 이상한 병실에서 핸드폰으로 내게 전화를 한 친구는 처음에는 능청을 떨었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푹 쉴 테니 걱정들 하지 마. 병명? 왜 그 있잖냐. 혈액의 구성비가 안 맞는다는… 적혈구와 백혈구의 구성 말이야… 백혈구 숫자가…”

놀라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는 내게 수화기 속의 친구는 말을 이었다. “모르면 말 해 줄께. 백혈병이라고들 하지.”

내 머릿속을 먼저 때린 것은 에릭 시갈의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제니퍼였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 소녀의 영상이 또 머리를 때렸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탁탁 두드리고/ 지붕 위로도 투두둑 툭툭 떨어져/비가 와! 온 들판에 비가 와.’ 유리 슐레비츠의 동시집 ‘비 오는 날’을 의사 아저씨에게 선물하고 죽는 그 소녀의 병명도 그것이었다.

우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혼인 때 그는 내 함진아비였고, 안타깝게도 신혼여행 중에 그가 결혼을 해 그의 함은 남의 등에 맡겨야 했다.

친구들 여섯 쌍이 부부동반으로 지금까지 만나오는 모임에서나, 같은 신앙인으로서 나보다 한 차원 높은 신앙 활동을 하는 점에서나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긍정적인 사고의 바탕 위에서 언제나 순리에 맞는 언행을 조용히 하는, 중용의 도인 같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그는 ‘속물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친구였다.

올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을 거라더니 11월 말에 벌써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내 백혈구 숫자가 300개래. 건강한 사람이 평균 7,000개라는데.” 혈액 1cc속의 백혈구 숫자를 설명하면서 그는 웃었다. “신생아가 되어버린 거야. 병균에 대한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

어처구니 없어하는 웃음과 낙천적인 성격의 습관적인 웃음을 섞어가며 친구는 오랫동안 전화를 끊지 않았다. 다른 부탁은 없고 기도를 많이 해 달라는, 처음과 똑 같은 당부를 했다. 그리고는 내 가슴에 바람이 이는 말을 했다. ‘암세포와 같이 살지 뭐’하는 신앙 속의 자신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변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신변을 정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는 것이다. 가장 보고 싶었던 국민학교 때의 선생님 한 분에게 연락을 했고, 물에 빠진 자기를 구해 낸 친척 형께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했단다. 마음으로부터 미워했던 사람을 떠올리며 용서해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이번 겨울을 넘기고 나면 건강한 몸이 될 꺼야. 너무 염려 말고 그냥 푹 쉬어버려. 올 겨울 동안만… . 체력을 생각해서 오늘은 이만 끊도록 하자.”

전화를 할 때마다 절망을 점점 더 느끼고 있던 내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일이 친구에게 일어났다. 그것을 친구는 ‘엄청난 신앙 체험’이었다고 표현하면서 전화로는 충분히 전할 수가 없노라 했다. 만나서 찬찬히 말해 주겠다고 했을 때 순간 나는 친구를 잃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 후, 담담하게 전해주는 그의 투병 모습에서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명씩 공동으로 쓰는 무균실에 있다가 지금은 인큐베이터로 들어왔어. 내 공간은 폭 3자에 길이 6자가 전부야. 양치질을 하는데도 하루 두 시간이 걸려. 입 안과 같은 점막부위는 세균의 공격을 받기에 취약한 곳이며, 칫솔을 쓰다가 잇몸이 상하면 안 되므로 옥시풀 적신 탈지면으로 닦아내고, 증류수 적신 탈지면으로 다시 닦아. 머리칼과 체모는 다 밀어버리고 없어.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지기도 했지만, 저항력이 없는 인체에서 재생이 활발한 부위들은 세균이 직접적으로 공격하므로 미리 다 밀어버린다는 거야.”

성탄전야에는 자정미사 참례를 못해서 속상해 있을 친구에게 전날 펄펄 내린 눈 소식을 전하면서 월하설경(月下雪景)의 불 켜진 창 풍경을 얘기했다. 친구는 시골 오두막집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싶다고 했다.

“계속 마음을 닦고 있어. 네가 수필 쓰는 것, 그것도 마음 닦는 거겠지… .백혈구 숫자? 200이야. 이제는 촉진제를 쓰기 시작하려나 봐….”

세밑에는 한파가 몰아쳤다. 친구의 쾌유를 비는 내 청원기도는 그 매서운 추위만큼이나 간절해져 갔다.

해가 바뀌고 소한을 넘기면서 또 한 번의 강추위가 왔다. 친구의 투병은 골수검사를 거쳐 척추의 골수에 예방용 항암제를 투여하는 단계로 진행되어 갔다.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가 취해지면서 치료의 강도도 점점 높여지는 것이다.

그동안 백혈구는 700을 고비로 며칠 전에 2,500까지 증가했으며 오늘은 4,500까지 올랐다는 낭보를 들었다. 내게 꼭 기적같이 들리는… .

이상하게도 나는 처음부터 겨울과 친구의 병을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외롭게 서 있을 그 큰 낙엽송이 바로 친구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겨울은 이제 대한(大寒)추위를 넘기면서 물러갈 것이다. 금빛 낙엽을 떨군 그 낙엽송에 새 잎이 돋을 날도 멀지 않으리라. 나는 오늘 겨울노래를 부른다.

 

설야에 불 켜진 창, 그 창에는

따뜻함과 평화가 있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정겨운 얘기를 나누는 집,

친구야 너는 그 집의 주인으로

있어야 한단다.

“오늘은 좀 어때? 밥은 많이 먹었느냐?”는 물음에 “혀가 아파 못 먹었어, 입이 죄를 많이 지어서”한 친구야. 죄를 지었어도 내가 더 많이 지었을 텐데 왜 그리 마음 닦기를 모질게 하느냐.

눈 온 다음에는 삭풍이 불지만 삭풍을 앞세우고 봄은 온다네. 친구여 봄이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다네.

1996년 봄 (200x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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