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旅 情 落 穗

tlsdkssk 2008. 3. 24. 23:49

여정낙수(旅情落穗)

여행은 혼자 다니는 맛이 괜찮다. 남도의 질펀한 인심들은 혼자 다니면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先賢의 동상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는 영악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자유인임을 실감한다. 하지만 한 폭의 절경 앞에서 인연 맺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없음에 아쉬워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쩔쩔맬 때는 스스로 자유인이 아님을 절감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나 자신에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자신에의 자유, 그것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성가실 때도 있다. 󰡒왜 혼자 오셨어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대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가장 적절한 답은 그냥 빙그레 웃어 주는 것이다.

-해남, 땅끝 마을, 보길도를 돌며

 

정선의 아우라지 처녀상 앞에서 사진 한 장 찍는다. 너무 애달픈 표정이어서 나도 따라 시무룩해진다. 이태리 북부도시 베로나의 줄리엣 동상이나, 중국 시안(西安)의 양귀비 목욕와상(臥像) 곁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미있는 포오즈를 취할 수가 없다. 줄리엣의 허리를 살짝 감거나 양귀비의 어깨를 팔로 껴안던 대담함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골지천 건너 여량리에 살았다는 이 처녀에게, 싱거운 길손, 단정치 못한 포오즈 한 번 취하다가 구절천 건너 유천리 그 총각에게 들키는 날에는… . 봄을 맞아 처녀는 싸리골에서 총각과 만나기로 하였으나 때아니게 내린 큰비로 강물이 불어 나룻배가 떠내려 가버렸단다.

골지천과 구절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의 언덕빼기 소나무 숲 옆에 처녀상은 있고, 동상 뒤 아우라지비에는 노랫말이 새겨져 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 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동박은 동백의 사투리라는데 강원도에 웬 동백? 하지만 정선 지방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박이라고 부른다 했다. 이른 봄 아주 작고 노르스름한 꽃을 피우는, 산수유와 착각 하리 만치 비슷한 나무.

겨우내, 남해안의 동백이 해풍 속에서 핏빛 정염을 잉태하는 동안 정선의 동박은 칼바람 속에서 노란 정한을 여미는가 보다.

숲 앞 정자에 오른다. 처녀는 하염없이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고 나는 정자에 앉아 처녀를 바라본다.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려다가, 애절한 여자에게 그것마저 조심스러워 나는 먼 산을 바라본다.

-조양강, 구절천과 골지천 합수머리에서

 

영월, 정선을 거쳐 백봉령으로 길을 잡는다. 끊어지는가 싶으면 이어지는 동강과 조양강의 물길을 따라 달리노라니 노르웨이의 하루가 떠오른다. 아침에 오슬로를 출발하여 산 넘고 재 넘어 북해의 항구도시 베르겐까지 가는 동안 5백km의 물길은 끊어질 줄 몰랐다. 호수 곁을 지나면 시내가 이어지고 시내가 끝나면 또 호수가 나타났다. 절벽을 끼고 곡예를 한 버스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곳이면 어디에든 파란 호수가 어김없이 손짓을 해 왔다. 육지 속의 좁고 긴 바다줄기 같은, 흡사 흐르는 강처럼 보이는 피오르드(Fjord)해안은 쾌속정으로 달렸다. 그런데 저녁에 버스에서 내리면서 내가 느낀 것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다. 요상한 게 인간심사라 하더니 처음 그렇게 좋던 물도 하루 종일 엇비슷한 풍경이 이어지니까 싫증이 나버리더라는 사실이다. 빙식곡(氷蝕谷)중에 세계 최장을 자랑한다는 송네피오르드(Songnefjord)만 해도 한참을 뱃길로 달리다보니 그게 그거고, 마치 소양호에서 인제로 올라가는 배를 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처음의 감흥을 지속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지금 나는 그런 기분으로 백봉령을 넘어가고 있다. 벌써 마음은 동해의 그 힘센 파도와 맞선다. 마알간 솔바람 내음은 이제 그만, 축축한 소금 냄새를 맡기 위해 달린다.

이 시대의 인생 천재 구영한(邱永漢)이 말한 인생론도 이런 것이 아니던가. 그는 󰡐인생은 계림(桂林)의 산과 같은 것이다󰡑라고 썼다. 중국 계림에서 리강의 유람선을 타고 수많은 기봉(奇峰)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천하의 경관(景觀)에 탄복하지만 1만개나 이어져 있는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처음 얼마동안이라는 것이다. 250권이 넘는 저서 가운데 하나인 󰡐나는 77세에 죽고 싶다󰡑에서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새로운 것이어야 인생에 감동을 준다. 고통과 비애마저도 기쁨과 마찬가지로 인생에 색조(色調)를 더하게 하는 것이며,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해 준다. 어떤 변화든 간에 그것이 반복되어 보통의 일이 되거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끝장인 것이다. 연극과 인생은 지루하게 생각되기 전에 끝내 주는 것이 좋고, 사는 동안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동해시와 삼척시의 경계선 바닷가에 한 발씩을 걸치고 있다는 추암(湫岩), 속칭 촛대바위를 바라본다. 암벽 아래, 파도가 크게 몰려오는 백사장을 골라 자리를 잡는다. 우르릉 철썩 쏴-쏴-.

- 백봉령 넘어 동해시에서

 

비 오는 바닷가 풍경은 색채가 담백해 좋다. 수평선이 하늘과 섞여 있는 듯 여리다. 바다와 파도와 모래와 바위, 뒤에 있는 소나무 숲마저 튀는 것이라곤 하나 없다.

바닷물은 왜 짤까? 피조물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 창조주에게서 받은 이 육신을 어떻게 남길까? '육신의 부활 신앙'을 믿는 내가 '장기 기증 증서'를 만들었던가?며칠 전 외손녀를 내게 안겨준 딸이 그걸 함께 만들자고 한 적이 있었는데...... 비 오는 바닷가에서 나는 영혼을 만난다.

-삼척 백사장에서 우산을 받치고 앉아

(200x15매)

작․품․노․트

윤후명 소설집‘여우사냥’의 작가 후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소설을 기행(紀行)소설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로서는 어디로든 조금도 떠난 느낌이 없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문학은 ‘떠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나는 항상 ’나‘를 찾아서 떠났을 뿐이었다.”

‘여정낙수’의 작가노트를 쓰면서 나는 윤후명과 비슷한 말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글의 소재는 여행지에서의 낙수들이지만 주제는 ‘나를 찾아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수필이 ‘기행편’으로 분류되지 않고 ‘인생편’으로 분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00년 6월

** ‘ 08년迎新동창회’에 갔더니 회장이 이런 덕담을 했다.

“1. 멋진 물건이 보인다. ‘살까 말까’ 사지마라! 가지고 있던 물건 버리면서 살아야 하는 나이이니…

2. ‘몸짱’‘얼짱’이 유혹을 한다. ‘바람피울까 말까’ 피워라! 젊어져서 좋다. 하지만 손주 재롱떠는 것 보는 게 바람피우는 것보다 더 재미있으니 손주 보며 살아라. 바람피우지 말고…

3. ‘여행 갈까 말까’ 가라! 떠나라! 비행기 5시간 이내 여행이면 누가 같이 가자고 하거든 무조건 떠나거라!”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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