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옆집 할머니

tlsdkssk 2005. 9. 2. 14:47

우리 옆집 301호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작년 여름 이 빌라로 이사와 처음 인사를 나눈 분이

바로 옆집 할머니였다.

이웃끼리도 삭막하게 지내는 요즘이지만

최소한 옆집은 알고 지내야 할 것 같아

벨을 누르니, 웬 할머님이 고개를 내민다.

연세가 80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데,

젊어서는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날 오후, 장에 나가 김치거리를 사들고 오는데,

밖에 계시던 할머니가 반색을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

"어이, 새댁, 그거 이리내, 내가 다 따듬아 줄테니..."

기겁을 했다.  날더러 새댁이라니, 

그리고 다듬어 주시겠다니...

난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노인에게 붙임성 있게 굴다가 영영 발목 잡힐 것 같아

미리 선수를 친거다.

시도 때도 없이 벨을 누리며 우리 집에 오시면 어쩌나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다행이 할머닌 그런 무례(?)는

행하지 않았다.

 

일부러 탐색한 건 아니지만, 옆집엔 주부가 없는 것 같다.

1년이 넘도록 할머니의 아들과 손자 둘 외엔

마주친 여자가 없었다.

사별했나? 이혼했나? 나는 가끔씩 갸우뚱 하며,

할머니께 먹을 것을 나누어 드리기도 했다.

 

한데 재밌는(?) 건,  날이 갈수록 할머니가

나를 못알아 보신다는 사실.

언젠가 산책 가는 길에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했더니,

'누군가?' 하는 표정이다.

"옆집 새댁이에요" 하기도 뭣하여 그냥 싱긋 웃고는,

그 후론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시지 못할 때엔

그냥 지나친다.

할머니로 하여금, 기억 안나는 사람을 한참 떠올리게 하는 것도

더위를 얹어드리는 일 같아 그냥 살짝 피해버린다.

만약 내가,

"저 옆집 사람인데요."하면,

할머닌 .

"아니 새댁이 언제 그렇게 늙었담?"하고 헷갈리실 게 아닌가.

혹은,

"새댁의 친정 에민가? 하실지도 모를 일,

 

지난번 휴가를 떠나던 날,

할머니께 신문좀 들여놔 달라고 부탁을 드리는데,

내가 모자를 쓰고 있어선지,  

'이 여자가 대체 뉘기여?' 하는 표정.

우리 현관 문이 열려 있으니,

할머닌 마지못해 나를 옆집 여자로 인정하는 눈빛이다. 

 

텅빈 집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게 무료하신지,

할머닌 동네 외출이 잦다.

별 일도 없이 그냥 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시기도 한다.

어지간만 하여도 이따금 할머니의 말벗이 되드리련만,

현재 내 코가 석자니 엄두를 못내겠다.

 

조금전 슈퍼에 다녀오다가 다시 할머니를 보았다.

어디 외출하는 사람마냥 옷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문화원 앞에 걸터 앉아 게셨다.

흘깃 할머니를 바라보았으나,

썬캡을 눌러쓴 나를 도무지 못알아 보시는 것 같아

이번에도 쌩하니 그냥 지나쳤다.

고여있는 호수같이 미동도 않는 할머니를

그렇게 지나쳐 갔다.

나는 왠지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내 마음 한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똥새를 보셨나요?  (0) 2005.09.05
옹알이를 하다  (0) 2005.09.03
강아지풀  (0) 2005.09.02
9월  (0) 2005.09.01
산에서 길을 잃다  (0) 2005.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