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낸시 우드 시/오늘은 죽기 좋은 날

tlsdkssk 2020. 2. 7. 13:31

1.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2.

내 안에 어린 소년이 있어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네.

그때 독수리가 나를 따라와

높고 넓게 보라고 가르쳐 주었어.

독수리는 멀리 날아가며 이렇게 말했어.

높이 날아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래야 너의 좁은 세상을 너무 소중히 여기지 않을 테니까.

네 시야를 하늘로 돌려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내 안에 어린 소녀가 있어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네.

그때 곰이 나를 따라와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가르쳐 주었어.

곰은 떠억 버티고 서서 이렇게 말했어.

혼자 있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래야 친구들의 겉치레에 홀리지 않을 테니까.

네 자신이 홀로 평화로워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내 안에 늙은 남자가 있어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네.

그때 들소가 나를 따라와

지혜를 가르쳐 주었어.

들소는 사라지면서 이렇게 말했어.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래야 네가 엿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침묵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내 안에 늙은 여자가 있어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네.

그때 들쥐가 나를 따라와

나의 한계를 가르쳐 주었어.

들쥐는 땅에 납작 엎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작은 것에 위안을 느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래야 네가 한밤중에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먹을 게 벌레뿐이라도 만족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래, 이건 옛날부터 전해 온 삶의 방식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야.

   독수리와

   곰과

   들소와

   쥐가 

   사방에서 다가와

   내 인생의 원을 그리는 데

   함께해 주었지.


나는 독수리야.

저 작은 세상은 나의 삶을 비웃지.

그러나 위대한 하늘만은 불멸을 꿈꾸는 나를

가슴에 품어 준다네.


나는 곰이야.

깊은 고독 속에서 바람을 닮아 가지.

난 입김으로 구름을 불어 모아

친구들의 초상을 만든다네.


나는 들소야.

내 목소리는 입 안에서 메아리치네.

난 삶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 불꽃의 연기와 나누어 가진다네.


나는 들쥐야.

내  삶은 내 코 바로 밑에 있지.

지평선을 향해 떠날 때마다

내가 발견하는 건 작은 구멍 하나.


                                                                         -[오늘은 죽기 좋은 날]낸시 우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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