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질투는 나의 힘/기형도

tlsdkssk 2020. 3. 3. 13:30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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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은 탑골공원 뒤 지린내 나는 심야극장의 구석자리에서 시인이 돌연 청춘을 마감한지 꼭 25년째 되는 날이다. 이쯤이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는 아닐지 몰라도 ‘힘없는 책갈피’가 끼워둔 종이를 떨어뜨리기에는 버겁지 않을 이른바 4반세기의 세월이다. 그리고 우린 이미 그가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며 ‘많은 공장’을 세웠다는 것도, 탄식과 머뭇거림으로 그토록 열심히 기록해둔 비망록의 낡고 어두운 부분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제 그 기억으로 한줌 향을 던지면서 그대와 우리의 삶을 회억하노라.

그의 비망록을 들추어보면 들끓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본의는 아니겠으나 무의미를 확대재생산 유포시키고 있다는 정황이 고루 넓게 포착된다. 뜬구름 잡듯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자신의 삶에 대한 허무와 부정적 그늘 또한 길게 드리워졌음을 본다. 결국 낙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대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꿈과 이상이 없는 젊은 날이 어디 있겠으며, 그 열망으로 채워보지 못한 젊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알지 않느냐, 현실은 누구에게나 쉽게 그것을 허락하진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질투한다. 왜 나는 이룰 수 없는가.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난 왜 아무것도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만 있을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대 희망의 내용도 질투였다.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지새는 젊은 날의 힘은 질투뿐이었다. 결국 내 안의 결핍에서 발아해 자라난 질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질투가 힘이 되어 우리를 조금이나마 전진케 하고 변화시켜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절망과 탄식의 시집이 25만 권 이상 팔렸고, 지금도 1년에 1만 권은 족히 팔려나가는 이 괴이한 현상은 또 무엇인가.

정말 그대로 날이 새는 걸까. 삶은 새로운 걸 얻기 위한 창조적인 과정이 아니라, 순전히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부러움에 사무친 나날일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뒤돌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잠그면서 생각해보니 알겠다. 고백하노니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후회할 겨를도 없이 기어이 ‘빈집’에 갇혀 돌아가지 못한다고. 돌아갈 수 없다고…….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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