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박재삼 시

tlsdkssk 2020. 3. 9. 20:03

박재삼시인 시상 10편을 감상해 보기

 

 

1 풀잎의 노래 / 박재삼

 

 

천지에 파랗게 풀잎들이 솟아

무슨 간절한 할말이라도 있는 듯

조용한 아우성을 지른다

, , , 야단스러이

일제히 소리하며 일어나고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환호를 치며 솟아오른다

 

,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은 시끄러운 말을 피하고

오직 바람 속에서 햇빛 속에서

몸을 통째로 내맡기고 있나니

파란 것이 어떻게

빛나는 것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것은 어릴 때부터 느껴온 수수께끼였어라

 

그리하여 그들은 드디어

바람에 흐르고

햇빛에 젖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해내면서도

그것을 다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묵묵한 가운데 치르는구나.

 

 

2 무봉천지(無縫天地) 박재삼

 

 

저저(底底)히 할말을 뇌일락하면 오히려 사무침이 무너져 한정없이 멍멍한 거라요. 문득 때까치가 울어 오거나 눈은 이미 장다리꽃밭에 흘려 있거나 한 거라요. 비 오는 날도, 구성진 생각을 앞질러 구성지게 울고 있는 빗소리라요. 어쩔 수 없는 거라요. 우리의 할 말은 우리의 살과 마음 밖에서 기쁘다면 우리보다 기쁘고 슬프다면 우리보다 슬프게 확실히 쟁쟁쟁 아지랭이 되어 있는 거라요. , 그 때, 아무도 없는 단오의 그네 위에서 아뜩하였더니, 절로는 옷고름이 풀리어, 사람에게 아니라도 부끄럽던거라요. 또는 변학도에게 퍼부을 말도 그 때의 장독진 아픔의 살이, 쓰린 소리를 빼랑빼랑 내고 있던 거라요. 허구헌 날 서방님 뜻 높을진저 바라면, 맑은 정신 속을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웃녘에 돌림병이 퍼져 서방님 살아계시기를 빌었을 때에도 웃마을의 복사꽃이 웃으면서 뜻을 받아 말하고 있던 거라요. 그러니 우리가 만나 옛말하고 오손도손 살 일이란 것도, 조촐한 비 개인 하늘 밑에서 서로의 눈이 무지개 선 서러운 산등성 같은 우리의 마음일 따름이라요.

 

 

3 사랑하는 사람 /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4 () /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 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 낼런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5 자연(自然)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6 나는 아직도 /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 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7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8 나룻배를 보면서 / 박재삼

 

 

저 만장(萬丈) 같은 넓은 못물 위에

사람은 작은 배를 만들어

띄워보지만

결국은

물결의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한 무늬를

약간은 지웠다는 것만

아픈 지국이 되어 남는데

 

사랑이여

나는 그대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 욕심이

그대의 그지없는 조용한 가슴에

상처만 남겼느니.

 

 

9 흥부 부부상 /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處地)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10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박재삼시인 프로필

 

1933. 4. 10 일본 도쿄[東京]~1997. 6. 8 서울.

 

김소월에게서 발원해 김영랑·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이었다.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했고, 1953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그의 시는 당시 서정주와 유치환이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때로 그의 시들은 '퇴영적인 한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절창(絶唱) 울음이 타는 가을강 등에서 드러나듯 '생활과 직결된 눈물을 재료로 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박재삼은 모더니즘·민중주의 등과 같은 경향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에도 어떤 계파에 몸을 두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지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향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비극적 사랑,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했다. 슬픔을 아는 시인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살았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함께 약 25년간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 관전평을 집필해 생계를 해결했으며 바둑계에선 '박국수'(朴國手)로 불렸다.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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