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디지틀 조선일보 칼럼 19 / 민혜

tlsdkssk 2014. 5. 17. 06:44
    

 

[디지틀조선일보 칼럼-힐링 에세이 19] 멍이 멍에게

  

 

 

    입력 : 2014.05.15 14:05

(김지현 기자 = bombom@chosun.com)디지틀조선일보는 매주 1회 칼럼 및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풍부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글 속에서 삶의 지혜와 인생의 용기, 치유의 힘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멍이 멍에게>

                                       민 혜 (수필가)

등산길에 멍이 생겼다. 오른팔에 생긴 멍은 처음엔 메추리알만한 크기였다. 색깔도 제법 고운 핑크색이라  립스틱을 살짝 문질러 놓은 것 같았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자 멍은 점점 번지며 계란만큼 커졌다. 빛깔은 가지를 짓이겨 놓은 듯한 짙은 보라색. 다행히 크게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비탈에서 발을 헛디뎌 굴렀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한 등산객의 도움으로 멈출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부상은 더 컸을 테니 멍 정도로 끝내준 것이 차라리 고맙기조차 했다.

이제 멍이 탈색되어 가고 있다. 보라색이 사위고 자주색이 드러나며 어느 부위는 치자 물감 들인 듯 노랗기도 하고 오이지같이 누르딩딩하기도 하다. 멍은 일주일 넘게 나의 심심풀이 구경감이 되어주었다. 칙칙하긴 해도 분홍과 보라와 자주와 황색의 오묘한 조화라니. 마치 내 몸속에 누군가 숨어 붓으로 물감을 칠해 놓는 것 같아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향연을 보는 게 흥미롭기도 했다. 한데 멍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돌연 내 가슴 속의 멍들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상처나 멍은 주로 인접 거리에서 생겨난다. 인간으로 빚어지는 상처도 대개는 가까운 관계에서 주고받는다. 얽히고 설킨 게 사람 사는 일이다 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오늘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고 내일은 누군가가 나로 인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살아오는 동안 심신의 멍은 알게 모르게 나의 내면과 외면을 울긋불긋 물들이곤 했다. 어떤 것은 현재진행형, 어떤 것은 그저 색감만 번져 있고, 어떤 것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무려나 멍이 생겼음은 살아 있다는 증표이며 멍이 사라짐 역시도 살아 있다는 증거일 테다.

일전에 다시 산에 올랐다.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봄을 전송하던 산은 여전히 바쁘게 수런거렸다. 드넓게 영토를 확장한 애기똥풀은 노란 웃음을 쏟아내고, 새들은 쌍쌍이 날고, 까마귀는 옹달샘에서 멱을 감고, 짙어진 숲에선 새들이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지 귀를 찢는 소리로 울어대었다. 그 와중에 내 눈길은 진달래 곁에 선 한 소나무에게로 쏠렸다. 자태가 수려하고 나이 또한 제법 먹었을 듯한 그의 몸통엔 웬일로 군데군데 아이 주먹 만 한 혹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나무에도 피부암이란 게 있는 걸까. 정확히는 몰라도 그것은 상처나 병고로 인한 몸부림의 흔적일 것이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 소나무의 거친 등피에 솟은 혹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혹 위로 내민 짧은 침엽 몇 가닥이 수염처럼 손바닥을 간질였다.

다시 두 팔로 가만히 그를 안아보았다. 나무는 내 손등이 서로 포개질 만한 볼륨으로 안겨왔다. 혹 하나가 말이라도 걸듯 가슴을 지긋이 눌러댄다. 나는 그 상처를 위무하듯 뺨을 살며시 대어보았다. 뒤이어 우듬지 쪽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그는 바늘 같은 잎새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둘이서 얼마간을 그러고 있었다. 시나브로 그가 내 가슴의 멍을 다 빨아들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처 : (사)창작수필문인회
글쓴이 : 야생화(조한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