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 혜 (수필가)
(김지현 기자 = bombom@chosun.com) 디지틀조선일보는 매주 1회 칼럼 및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풍부한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글 속에서 삶의 지혜와 인생의 용기, 치유의 힘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멸치국물 같은 언어
민 혜 (수필가)
사교적 언변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피차 친숙한 사이라면 이런 행위가 굳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어정쩡한 관계나 이해가 얽힌 사이에선 언어 속의 치장들이 외교사절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달콤한 언변에 목석처럼 대응하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가볍게 건네는 덕담이거나 빈말임을 알지라도 일단은 그 말이 주는 감미에 입부터 벌어지기 십상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방식대로 상대의 말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되도록 빈 말을 삼가려 한다. 전혀 안 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느낌이나 생각의 전달에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한 편이다. 때문인지 남의 말을 들을 때도 여과 없이 듣는 통에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곤 했다. 처세술이 뛰어난 상대일수록 쫀득한 언어를 날리는지라 그 접착성에 이 순진탱이(?)는 그만 철썩 붙곤 하였다. 나에 대한 접대용 찬사에 대해선 덤덤히 넘길 수 있었지만, 조만간 꼭 만나고 싶다던가, 자기 집에 꼭 놀러 오라던가, 특별한 시간을 함께 보내자던가 하는 식의 말들에 대해선 그 곡진함과 각별함에 감동되어 가급적 상대의 말을 존중해주고자 했다.
결과는? 하하, 번번이 ‘꽝’이었다. 그건 거의가 냉수 한 잔만도 못한 공허한 말들. 상대의 말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내가 그 마음에 대한 답례로 시간을 쪼개려하면, 그들은 까맣게 잊고 있거나 이런 저런 변명을 둘러대며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닌가.
그런 일을 겪은 뒤론 나는 그들의 말을 일단은 한 귀로 흘려버리거나 깎아내려 노력한다. 취할 것은 취하고 거를 것은 거르느라 나의 뇌는 잠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고 나면 허방이라도 디딘 듯 심신이 기우뚱거리고 마음 한구석이 못내 썰렁해지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모두가 허위는 아니었으리. 진실 1/2 티스푼에 허풍이란 조미료 1 테이블스푼, 사람을 끌어당기는 비장의 향신료 몇 방울이 들어갔겠지. 제조 비율이야 조리사 취향에 따라 조금 다르기도 했을 터.
한데 사람에 따라선 사교성 넘치는 언어가 되레 진솔한 친교를 저해하는 비사교적 언어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언제나 우리를 편안케 하는 말은 담백한 멸치 국물 같은 언어, 화장기 거두어 속살 내비치는 투명한 언어가 아닐까. 아니 때론 언어마저 과감히 생략된 따스한 눈빛이나 미소 하나만으로도 우리 가슴은 충분히 촉촉해질 수 있는 것을.
나른한 봄날의 오후, 문득 나는 멸치와 다시마로 우려 낸 따끈한 소면 한 그릇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