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예수 그리스도는 왜 카르마에 대해..>

tlsdkssk 2018. 4. 8. 20:39

<예수 그리스도는 왜 카르마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을까요?>


   에고와 카르마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카르마라는 주제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은 낭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불필요한 방향 전환으로 보였을 수 있고, 만일 카르마라는 주제를 꺼냈다면 그것은 당시 문화에서는 일탈로 비쳤을 것입니다. 인도나 극동처럼 영적으로 발전된 사회에서 카르마는 이미 받아들여진 개념이었고, 사람들에게 상당히 친숙했지요. 하지만 예수가 살았던 당시의 주민들은 그러한 주제를 이질적인 것이나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원은 에고의 부정적 측면(죄)을 자진해서 높고 무조건적 사랑과 영적 미덕을 위해 애쓰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예수는 알고 있었습니다. 에고가 영적 노력의 초점이라면, 에고의 해소는 에고의 형성에 관련되었던 카르마의 종말을 가리키는 신호지요. 예수는 죄가 영혼의 운명(카르마)은 하늘나라가 아니면 지옥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붓다와 예수는 스승, 구세주, 혹은 성령의 중재가 갖는 힘과 영적 도움 없이는 에고를 극복할 수 없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필요성은 동양 종교들이 이미 받아들인 전통이었지요. 동양의 종교에서 현인은 영적 힘과 진실에 대한 가르침의 근원이나 수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개별적인 구도자의 삶에서 스승이 필요조건인지 아닌지는 근육테스트를 이용하여 명확히 알아낼 수 있지요.

  
   예수는 엘리아가 세례요한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을 때 환생을 인정했습니다. (마태복음 11:7-14, 17:10-13) 근육 테스트를 이용한 영적 연구에 따르면 예수는 그 이전에 인간 삶을 받은 적이 없으며, 사실상 하늘나라에서 곧장 내려왔지요. 예수의 목적은 신과 하늘나라의 실상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의 사명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한 연구 방식에 따르면, 구세주는 600수준 이하로 측정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으로서 수많은 전생이 있었던 붓다의 목적은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이른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전생을 기억했고 카르마가 주는 교훈과 부정적 카르마(죄)를 피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부정적 카르마는 영혼이 육체의 죽음뒤에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것입니다.


   영적으로 진보한 구도자들은 단순히 두려움이나 죄책감에서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에서 미덕과 하늘나라를 택합니다. 죄가 일차적으로 무지와 동물 본능이 합쳐진 것이라면 그것을 '혐오'하는 것은 역효과를 내며, 그로 인해 에고의 또 다른 위치성에 붙들리게 되지요.


데이비드 호킨스 - 호모 스피리투스 164~165p

출처 : 의식 혁명
글쓴이 : 내려놓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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