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민 혜
기억이란 세월과 함께 풍화 과정을 밟는다. 내 추억 속의 남산만은 어째 닳아지질 않는다. 유년 시절, 나는 매일 남산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집 밖으로 나서면, 산은 같은 키로 늘어 서 있는 2층 적산가옥들에 가리어서 보이질 않았다. 샛골목으로 접어들어야 산은 숨겼던 그 몸매를 조금씩 내밀어 주었다.
산은 언제나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웠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산은 쉽사리 내 손아귀로 들어왔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남산은 하늘 아래 가장 높았고, 남산 보다 더 높은 건 없는 줄 알았다. 나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나를 데리고 남산엘 오르셨다. 아버지 어깨엔 묵직한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가는 곳은 약수터까지였지만 다섯 살 나이로는 적잖이 힘겨운 걸음이었으리라.
봄이면 개나리가 남산 언저리를 눈이 부시도록 물들였다. 봄은 개나리의 노랑과 함께 찾아왔다. 그 무렵의 사진을 보면 한 여름에도 남산을 오른 흔적이 역력한데, 현기증이 나도록 노랬던 개나리의 잔영 때문인지 내 기억은 한사코 봄날에만 남산을 올랐다고 지금도 고집한다. 참말이지 개나리는 어디에 그 많은 물감들을 숨겨두었다 봄이면 그렇게 샛노란 빛깔을 쏟아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남산에 보다 더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집이 바로 남산 밑인 데도 남산을 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남산으로 데려가지도 않으셨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었고 나는 그 소리를 숨죽여 들으며 이불 속에서 울음을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뭔가 크고 어둡고 불길한 것이 산처럼 우뚝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 집안에 큰 동공(洞空) 하나가 생겨난 것 같았다. 아버지가 빚을 지게 된 연유는 5.16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로 빚어진 일이라고만 짐작했을 뿐이다.
가장이 사라진 집안을 어머니 홀로 힘들게 꾸려갔다. 엄동설한에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에 취직하여 아침이면 어디론가 바삐 나가셨다. 하루하루 우리 가족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장애물 경주하듯 이어졌다. 고개는 높낮이가 다른 산의 능선과 같아서 어떤 것은 오를 만했고 어떤 것은 깔딱 고개처럼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끼니를 찾아 먹는 일, 중학교에 내야 할 입학금을 신경 써야하는 일, 빚쟁이로부터 알량한 재산을 지키는 일…. 아버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루는 긴 손톱에 새빨간 에나멜을 칠한 빚쟁이 아줌마가 찾아와 쌀자루를 들고 갔다. 사채업자였던 그녀는 검은 피부에 뾰족한 턱을 지녔고, 얼굴에 난 여드름 자국마다 밀가루 같은 분칠이 겉돌고 있어 짙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인상이 여간 가년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쌀자루를 부여잡는 내 손등을 할퀴고 기어이 그것을 빼앗았다. 그녀의 손톱이 지나간 내 손등엔 이내 색연필로 그은 듯한 손톱자국과 함께 선홍색 핏방울이 내비쳤다. 나는 상처가 아픈 줄도 몰랐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쌀자루를 포획하고 물러갔지만 다음 날이면 또다시 우리 집을 찾아 올 게 뻔했다. 하루하루 산마루를 넘고 또 넘어도, 넘어야 할 된비알은 다시 몸통을 들이밀며 앞을 가로 막았다. 끝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얼른 해 저물고 어둠 내려 잠자리에 들 시간이 찾아오기만을 나는 간절히 기원했다.
내 앞에 다시 산이 다가온 것은 결혼한 뒤 오십 중반을 넘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집안에만 칩거해 있었고 나는 맨살로 세파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 때 생각난 게 산이었다. 들짐승처럼 무작정 산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제야 비로소 서울의 산들을 둘러보았지만 높다랗게 우뚝한 산을 홀로 오를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삼복염천에 나는 작정하고 매일 동네 한 바퀴를 1시간 여 돌고 돌았다. 산에 오를 체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기력이 탈진하여 거실 바닥에 길게 뻗어 천정만 바라보기가 일쑤였다. 그러기를 한 달 여. 그 후 나는 산행 클럽에 가입하여 매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노라면 숨은 턱에 닿고 몸은 혹한에도 땀으로 질척였으며 옷 밖으론 허연 김이 연신 새어나왔다. 산에 오르면 의식이 아주 단순해지는 게 신기했다. 거대한 산이 나를 품어준 것만이 그저 고마웠다.
1년 쯤 지나 나는 첫돌 맞은 아이 걸음 떼듯 홀로 하는 산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인양 산의 체취에 코를 박으며 흙 위에 뒹굴어도 보고 맨발이 되어 네 발(?)로도 산을 올랐다. 간단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속에 내 삶의 무거움도 함께 빠져나갔다. 봄비 내리는 연두빛 산도 걸어보고, 삭풍 부는 겨울날의 호젓한 산길을 걸어도 봤다. 그런 날 일반 등산로를 벗어나 인적 드문 길을 걷노라면, 낙엽을 밟고 지나간 사람 발자국이 보이던 조붓한 산길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아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기 십상이었다. 뼈 속 깊은 추위와 적막 가운데서도 이상스레 나는 겨울 산에 이끌렸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겨울의 마른 숲은 잎새들의 서걱대는 소리와 함께 신음을 내지르며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산의 암석도 맨몸으로 바람과 맞싸우다 언젠가는 닳아질 것이었다. 지표 위를 덮었던 낙엽들은 거센 바람에 몸부림을 쳐대며 뒹굴고, 어떤 것은 분수처럼 공중으로 치솟고, 어떤 것은 눈발처럼 위에서 아래로 나부끼다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수세를 자랑하던 낙락장송도 근육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덧없이 꺾여 내렸다. 산이 그 품에 거느렸던 모든 식솔들은 강풍을 만나 맥없이 스러지고 흩어지며 숨어들었다. 산이란 바위를 뼈대로 솟아난 불굴의 뫼인 줄만 알았을 뿐, 그도 지난한 생명들을 품은 채 자기 식솔들의 생로병사를 지키며 온갖 풍상을 지긋이 견뎌내고 있다는 걸 예전엔 몰랐다.
산 속에서 나는 나와 유사한 방랑객을 만나기도 했다. 김밥으로 궁색한 점심을 때우려는데, 내가 앉은 바위 밑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고양이의 움직임은 눈송이처럼 사뿐하여 나는 그의 존재를 금방 알아채지 못하였다. 미풍조차 불지 않는 산은 온통 하얗고 두툼한 눈 이불을 뒤집어쓴 채 깊은 동면에 빠진 듯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잡티 없는 코발트 불루를 풀어놓았고, 눈의 흡음(吸音) 효과인지 한낮임에도 비현실적 고요만이 온 산을 휘감았다. 그 아무도 이 순결한 고요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무위(無爲)의 순간을 호사스럽게 즐기고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놀랍게도 고양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내 손에 들린 김밥을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몇 날을 굶은 듯 고양이의 몰골은 양 볼이 움푹하니 궁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는 김밥을 손에 들고 녀석에게 오라는 시늉을 했지만 놈은 한 발짝도 다가서지 않은 채 연신 침만 넘겼다. 남은 양식을 모두 고양이에게 내어주고 나는 휘적휘적 산길을 내려왔다. 녀석은 집둘레를 돌며 쓰레기를 뒤져 먹는 길고양이의 안전한(?) 삶을 버리고 어쩌다 이 산속까지 기어들어와 산고양이가 됐을까.
너무나도 정확히, 산은 사람이 오른, 꼭 그만큼만, 자신을 열어 보인다. 실은 인생도 살아낸 그만큼만 실체를 보여준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지름길도 있고 두름길도 있게 마련이다. 눈앞에 암벽이 가로막혀 끙끙거리며 바위를 오르고 났더니 바로 옆에 에움길이 있는 걸 보고 빙긋 웃음이 난 적도 있다. 산이란 오르막길에서도 내리막을 거쳐 가기도 하고, 내리막길에서도 오르막을 통과하기도 한다. 고봉준령을 넘어 정상에 올라 빛나는 깃발을 꽂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야트막한 산언저리나 겨우 오르다 가는 이도 있으니 이 또한 우리네 인생살이 아닌가.
어린 시절 산을 보고 자랐던 나는 황혼녘이 되어서도 산을 보며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창밖으론 북한산과 도봉산과 수락산이 보인다. 인근에 명산들을 끼고 있어 나는 한 동안 그 산들을 꽤나 많이 올랐다. 이제 내 유년의 봄날은 가뭇없이 사라졌고, 단내 나던 여름날도 강물처럼 흘러갔다. 지금 나는 가을을 살고 있고 내 기력은 해마다 쇠진하여 다시 산이 두렵다. 모든 산이 정녕 두려웁다.
아무려나 언제고 나는, 내 평생을 오르내리며 웃고 울었던 삶의 산마루 고갯길에서 내려오다가 마른 들풀처럼 스러지고 말 것을 안다. 산은 그제야 곤고했던 나를 품어 넉넉한 잠을 허락해 줄 것이다.
<수상 소감>
가슴 가득 연필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길이가 60~70cm는 족히 돼 보이는, 아주 길고도 특이한 연필을. 지난 9월 하순 어느 날 꿈속에서의 일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0월 15일의 정오 무렵, 망연히 북한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전화 한통을 받았다. <산>이 5회 목포문학상 수필 본상으로 결정됐다는 전갈이었다. 실감나지 않았다. 잿빛 물기 흐르는 창 너머의 먼 산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 북한산은 오전 내내 희부연 비구름으로 가려있더니 오후가 되어서야 예의 그 선명하고도 짙은 암회색 빛으로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그제야 느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맞아, 내가 저 산을 글로 적은 적이 있었지. 나는 산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한 시절, 나는 틈만 나면 산으로 갔다. 마음이 궂은 날이나 갠 날이나 마냥 산으로 갔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게 나의 큰 위안이었다. 산을 오르다 산에서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산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삶에도 문학에도 있을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산을 찾고 싶다. 나와 함께 겨울 산에서 추운 점심을 나누었던 고양이가 생각난다. 이번 글에 그 고양이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부족한 내 글을 뽑아준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수상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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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주제의 통일성, 소제의 적절성, 효율적인 구성, 문장력 등이 조화를 이뤄 인생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문장이 치장이나 과장법이 없이 진솔, 단아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적인 내공과 마음의 연마를 보았다. 이 작가의 또 하나의 작품인 <베토벤을 만났을까>도 3년 전에 타계한 남편을 회상하면서 쓴 글로써 자연스럽게 공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었다. 목포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더욱 분발하여 좋은 작가가 되길 바란다.<정목일 선생님 심사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