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세련된 작업

tlsdkssk 2012. 4. 1. 18:20

초우 선생 가신지도 어언 3년, 며칠 있으면 벌써 세번째 다가오는 기일이다.

오후에 문득 초우샘이 떠오른 건 기일이 가까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득 생각이 났기에 기일을  기억해 낸 건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상관 없다. 나는 단지 그분이 내게 얼마나  세련된 작업을 해왔는가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 싶을 뿐이니까.

40대 후반 무렵이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저, 장.돈.식입니다."하시는 게 아닌가. 이름 석자를 스타카토로 강조하셨다.

창수에 실린 내 글이 좋기에 전화를 하는 것이라며

"후배가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걸 보니 나는 이제 붓을 꺾어야할까봐요." 하신다.

이어지는 웃음 소리는 다분히 능청한 것이로되 그러나 왠지 경쾌하게 들려왔다.

연세에 비해 놀라울 만큼 젊고 좋은 음성 덕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감사하다는 소감만 밝히며 끊었던 것 같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여의도 어느 연회장에서 초우 선생을 다시 만났다.

세미나인지 워크샵인지가 있는 날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날의 일정이 끝나고 부페장으로 들어갔는데.

아는 이도 별로 없고 숫기도 없어 나는 원탁에 앉아 음식만 열심히 축내고 있었다.

무리들과 좀 떨어진 지점에서 음식을 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분이 접시를 들고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여자는 약간 긴장을 하고 있을 때가 아름답게 보이죠. 민혜 선생, 지금 약간 긴장하신 거 맞죠?"

내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 또한 다분히 능청스런 작업이로되 결코 그렇게 다가오질 않았다.

그것이 그분이 지닌 능력이요 힘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산방 초대를 받았을 때 일이다.

난, 그분이 나 혼자 오는 것을 더 반기시는 걸 알면서도 보디가드(?)를 대동하겠노라 통고했다.

나보다 열두살 연하의 멋진 소설가 남자 문우와 가겠노라고.

그러자 샘은 허허 웃으며,

"혼자 오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단 말이요? "우리 마누라는 젊은 목사를 보고 오는 날은 아주 싱싱해져요.

애나가 축 늘어진 걸 보는 것 보다야 멋진 남성 친구 대동하고 싱싱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 나로서도 득 되고 즐거운 일이죠."

역시나 그분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이같은 고단수 작업으로 녹이셨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한데 나는 초우샘과 매우 가까이 지내면서도 늘 미꾸라지 같이 빠져나가기만 한 것 같다.

그분의 딱 두 가지가 걸렸다.

첫째는 자신이 대단히 멋진 남성이란 걸 스스로 자각하고 즐기는 듯한 그분의 자신감이었고,

둘째는 여든 넘어 느껴지기 시작한 그 분의 ...이었는데, 나는 초우샘께 둘째번 감정은 실토하였고

첫번재 감정은 실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분이 지닌 거인적 풍모와 인간미에는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초우샘은 당신이 기르던 애묘 愛那의 이름을 나의 애칭으로 하사하셨는데,

본의 아니게 나는 은덕 모르는 고양이처럼 그분을 할퀸 것 같다.

그분과 마지막 진한 포옹을 나눈 것은 간암으로 임종하기 달포전쯤 병실 문안을 갔을 때였다.

당당하던 신체가 마른 장작처럼 야위어 계시건만  나를 보자 미소를 지으셨다.

그리고 반갑다며 이내 눈물을 보이셨다. 미소와 포옹과 눈물. 이것이 그분과 마지막 나눈 모든 것이었다.

'내 마음 한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주  (0) 2012.06.11
영정 사진에 대하여  (0) 2012.06.05
밴드쟁이 엘리  (0) 2012.03.31
아들의 포옹  (0) 2012.03.24
쇼팽과 지낸 밤  (0) 2012.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