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도가니법을 만들자고?

tlsdkssk 2011. 10. 1. 10:18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가 영화로 만들어지더니

이슈와 흥행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모양이다.

소설의 위대성을 새삼 실감하며 본격 문학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비롯한 수필문학에 대해 안타까움도 솟구친다.

나는 아마 <도가니>란 영화를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어둡고 침울한 영화는 이젠  보기가 힘들 뿐더러

요즘 정치권까지 뜨겁게 만드는 그 어두운 현실이 내겐 새삼스럽지 않게 다가오는 때문이다.

범법자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수 많은 법을 만들어내도 인류사에 범죄는 사라지지 않듯이

인간을 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란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차원에서 도가니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겠다.

 

3년 전 여름인가, 나는 한 사회복지사로부터 어느 장애인 기관의 원장 이야기를 전해듣고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소설 도가니의 모티브가 된 학교와는 달리 규모가 작은 기관이라

장애인들을 향한 가해지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장이라는 자가  전직 성직자였기에

내 충격은 더 극렬했다. 성직자라고 해서 범인들과 크게 다를 건 없겠지만 그래도  충격은 퍽이나 컸다.

그곳이 만약 좀 더 큰 기관이었자면 도가니 경우처럼 가해자들도 더 많았을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전해들으며 장애인 복지가관을 볼 때마다 한줌 의혹의 시선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선의의 기관엔 참으로 미안한 노릇이나 여성들을 향한 남성들의 성폭력이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이 비단 장애인이나 약자만을 향한 수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 나도 성추행이란 걸 겪어본 적이 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 교통 안에서 자행되는 것 말고 학교 선생님과 친인척들에게 당한 경우다.

그들은 내가 어리기에 모를 줄 알고 나를 성욕의 대체품으로 삼은 모양인데, 아무리 어려도 자연스러운 스킨쉽과

부자연스런 접촉은 직감적으로 알게 마련이다.

초딩 3년 때, 육사를 다니던 J아저씨는 우리 집엘 자주 놀러 왔는데. 집에 오면 언제나 나를 끌어안고 뽀뽀한다며

자기의 입술을 내 입안에 밀어 넣으려 하였고 내가 학교 합주부를 하던 시절 첼로 선생은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전세버스 안에서 늘 내 옆에 앉던지 아니면 나를 자기 무릎에 앉혀 놓고 내 허벅지 깊은 곳을 주무르곤 했다.

나는 장애인도 아니고 주위에 사람이 많은 상황에서도 그러 했으니 은밀한 곳에서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횡포는

얼마나 더 추악핟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노릇이다.

나는 엄마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을 끓이며 공포에 젖기도 했다.

하루는 총연습이 끝난 뒤 첼로 선생(그는 당시 KBS 교향악단 단원이었다)이 방가후에 나를 자꾸 따라와

숨이 턱에 닿게 도망치던 일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이랴. 너도, 또 너도 나에게 추한 접근을 하려 하였지. 

말을 안해 그렇지 이런 경험이 어찌 내게만 있을까.

통제를 모르는 추한 성욕과 걸레짝 같은  양심이 빚어내는 성추행 사건은 법을 만든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의 도가니 열풍이  한편으론 서글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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