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한 장의 의미

tlsdkssk 2009. 3. 25. 12:44
 


0903  수필



                                                   한 장의 의미

                                          

                                           



  혼자 실실 웃는다. 머잖아 한 장은 쥐겠구나 싶어서다. 남편 모르는 내 뒷돈이 그렇다는 얘기인데, 만기 보험금과 기타 저축이 모여 제법 목돈을 이루었다. 예나 지금이나 뒤로 꿍쳐둔 돈의 맛은 비밀한 애인인 듯 짜릿한 감미를 안겨준다. 아니, 나이 먹는 징조인지 그 위력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이 나이에 까짓 한 장쯤이 무어 그리 대수냐고 할지 모르나 결코 쉽게 모아진 돈이 아니었다. 그 속엔 내 삶의 애환들이 낱장마다 스며 있기도 하다. 때 되어 애경사비를 마음껏 하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며 택시비를 아끼려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댔던 일이며 친정어머니에게까지 인색을 떨기도 했던 갖은 허기와 궁기들이 면면이 얼룩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모자란 한 장을 채울 때까지 꽤나 절제하며 돈을 모을 것 같다. 아흔아홉 섬 가진 자가 한 섬을 탐한다는 건 탐욕에 앞서 완전한 하나를 향한 순연한 열망이 아닐까. 아귀 채운 하나란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도 될 테니 말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어쩌면 이 돈 역시 잠시 내 수중에서 은밀하게 노닐다가 결국은 흔적 모르게 이리저리 흩어질지 모른다. 혼자 머리를 굴려본다. 한 장이 채워지는 날 어떤 잔치를 벌일까. 책도 다시 내고 여행도 떠나봐?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단체에 한 몫을 떼어 보내? 매만져보기만 했던 고가품의 등산복도 망설임 없이 사들여봐? 지금은 내 인생의 황혼기, 자식도 제 둥지를 탄탄히 틀었으니 알토란같이 모은 이 돈은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리. 아무려나 이번만큼은 어림도 없다며 결연한 다짐을 해보지만 글쎄다. 

  금전의 액수를 말할 때 흔히 ‘한 장’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천 원 짜리 한 장도 한 장, 만 원 권 한 장도 한 장이다. 만 원이 넘고부터는 십만, 백만, 천만, 억 등의 단위로 내실이 다져지고 격을 갖추어야 비로소 한 장 측에 낄 수가 있다.  

  내겐 한 장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다. 8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남편이 있는 대구와 서울 집을 오가며 살았다. 어느 날 서울에 와 친정에 들렀더니 어머니가 흰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친정에 가면 어머닌 이따금 여비를 주시곤 했기에 노회한 계산이 앞섰다. 한 장 쯤의 부피이니 수표일 테고, 봉투에 넣어 주는 걸 보면 용돈조로 주시는 10만 원권 한 장? 

  봉투 속엔 뜻밖에도 1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웬 돈이냐 물었더니 어머니는 날더러 반지를 하나 사 끼라고 하셨다. 갑작스레 반지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옛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 나이 서른이 좀 넘었을 때다. 남편의 일로 동생에게 적잖은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직장을 그만 두고 벌렸던 남편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동생에게서 가져온 돈은 결국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올케도 생활비에 쪼들렸던지 동생의 뜻과 상관없이 어머니를 통해 빚 독촉을 해왔다. 기억이 영 안 나는데 그 때 내가 어머니에게 돈 대신 결혼 때 받은 패물이며 아이 돌 반지까지 모두 내놓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패물들을 올케에게 전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건만 아무튼 그 패물은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평생 그 일이 가슴 아팠다며 당신 용돈에서 모은 100만원 한 장을 내놓으신 거였다.

  어머닌 연신 눈물을 찍어내며 액수 같은 건 따지지 말고 이 한 장으로 모든 걸 잊자고 하셨다. 한데 참 이상도 하지, 아무리 돌이키려 해도 도무지 생각이 안 떠올라 잊고 어쩌고 할 건더기가 없었다. 사람은 괴롭거나 힘든 일을 겪으면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로 부분적 기억 상실증에 걸리기도 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을까. 나는 다만 하얗게 망각되어진 기억 속의 그 광경을 어머니의 구술을 통해 멜로 영화 구경하듯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안 받겠다 받아라 실랑이를 벌였지만 나는 결국 수표를 받고 말았다. 어머닌 그 돈을 절대로 딴 데 쓰지 말고 반지를 사서 반드시 반지 낀 손을 보여 달라고 하셨다. 평소 액세서리를 즐기지 않아 반지를 안 끼고 다녔을 뿐인데 속도 모르고 그게 몹시 걸리셨던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내 뒷돈에나 보태면 좋으련만 도리 없이 보석상과 백화점을 기웃거렸다.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저마다 광채를 내뿜으며 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중 세공이 맘에 드는 다이아반지의 가격을 물어보았다. 짐작대로 내가 지닌 한 장으론 어림도 없었다. 의무감에 떠밀려 나는 토마토케첩 빛의 산호 반지를 서둘러 고르고 몇 개의 금붙이를 샀다. 게 중엔 아기용 돌 반지도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그간 당신의 마음을 바위짝처럼 내리 눌렀던 과거를 청산하신 듯 했다. 많든 적든 성의껏 아귀 채운 한 장의 힘이었음을 안다. 그 한 장 속엔 어머니의 최소와 최대가 함께 영글어 있었을 게고 한 알의 열매처럼 나름의 완전성을 내포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9와 10, 99와 100, 999와 1000이란 수치의 차이는 미미하나 와 닿는 느낌은 코 빠진 하나에 견줄 바가 아니다.

  한 장이란 시작이요 마침이다. 또한 마침이자 시작도 된다. 하지만 이번의 한 장을 채우고 나면 더 이상은 벌이지 않으려 한다. 내 깜냥으론 그것으로 족하고 은밀한 놀음일랑 이제 그만 접고 싶다.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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