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비오는 날 오후 3시에

tlsdkssk 2010. 4. 30. 17:09
 

0907수필



                     비 오는 날 오후 3시에

    

                                                           


 

   비 내리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파초 잎새에 비 듣는 낭만은 없어도 여름 날 오후, 그 한적한 맛이 제법 괜찮다. 오늘은 우요일(雨曜日), 볼 일도, 만날 사람도, 하물며 모처럼 집안일로부터도 자유롭다. 벌렁, 소파에 몸을 눕힌다. 눈과 대칭 방향의 탁상시계에 시선이 멎는다. 시각은 오후 3시. 정확히는 3시가 조금 안됐지만 바늘은 이내 직각을 이룬다. 오후 3시, 비 오는 날 오후 3시다. 돌연 정수리로 차가운 빗줄기 하나가 꽂히는 것 같다. 아, 그 사람!

 

  3년 전 8월 중순, 대녀 안젤라와 함께 호남지방을 떠돌던 때의 일이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뜬구름처럼 흘러 다니던 차에 대녀가 전남 무안의 한 지인 이야기를 꺼내었다. 도심을 떠나 홀로 초야에 묻혀 사는 서당 훈장님이 있으니 잠깐 들러 가자는 거였다. 마침 그쪽과 연락이 잘 닿았다. 나는 허연 수염 풀풀한 어르신인가 했는데 웬걸, 마을 어귀에 나타난 사람은 아직 환갑도 안 지난 젊은이(?)였다. 그는 하이얀 모시 한복에 푸르스름 쪽물 들인 두루마기를 팔에 걸치고 머리엔 양산만한 삿갓을 쓰고 오른 손엔 상반신을 거의 가리울 합죽선을 든 전형적인 한량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온 몸을 서양 명품으로 둘러싼들 지금 내 눈앞의 저 이보다 더 멋스러울까. 반듯한 자세에 걸치고 두른 모든 게 하나도 겉돌지 않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오를 지난 태양은 달군 무쇠 솥처럼 지글거리고 땅은 몸부림치듯 지열을 뿜어냈지만 몸을 놀릴 때 마다 그에게선 살랑살랑 바람이 일었다. 인근 식당으로 차를 몰고 가 점심을 먹고 선생의 거처로 오기까지 그는 한 번도 두루마기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나는 슬몃 장난기가 동했다.

  “두루마기는 그냥 폼이신가 봐요.”

  “맞습니다. 훈장이니까요.”

  그의 웃음엔 익살이 가득하고 살짝, 내 맨 팔뚝 위로 그의 옥색 두루마기 풀기가 스쳐갔다. 가족 떠나 혼자 사는데 모시옷의 푸새는 누가 하느냐 물으니 자신은 ‘독립군’이므로 본인이 다 한다면서 서당의 곳곳을 보여준다. 10년 전 폐가를 구입해 혼자 손을 보았다는 서당은 그 디테일 모두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안목이 여성보다 더 꼼꼼하고 치밀한 것 같았다. 창가의 조촐한 분이며 뜰에 심어놓은 꽃빛깔에도 그가 얼마나 섬세한 심미안을 지닌 사람인가를 느끼게 했다. 진한 감동을 받을 때 그렇듯 나는 그만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의 호는 초암(草庵), 문득 작고하신 원주의 초우(草友) 선생이 상기되었다. 초우 선생이 서구적 자유인이라면 초암 선생은 동양적 자유인, 살아가는 방법이나 외모도 한 사람은 서구적이요, 또 한 사람은 동양적이다. 박 훈장은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즉석에서 화구를 펼쳐 놓고 부채 위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비 오는 날 오후 세시를 좋아한다고  말을 건네 온다. 나는 가만히 그의 붓놀림만 주시할 뿐이다. 한 순간 밑동 굵은 시커먼 가지가 불끈 솟는가 싶더니 뒤이어 매화 송이가 방울방울 달린다. 그의 손길 어느 구석에 매화가 숨어 있다가 저리도 잽싸게 꽃을 피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안이 원주만 같았어도 아마 나는 월선 서당과 그 주인에 끌려 보다 자주 찾아갔을 것이다. 

  작년 여름, 선생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한지에 싼 부채 세 점을 우편으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이번엔 청풍(淸風)과 난과 모란이었다. 보내드린 내 수필집에서 ‘난’과 ‘모란꽃’을 읽고 보낸 것 같다. 나에게 ‘모란 여인’이라 칭해왔다. 전화를 하려다 나는 이메일로 감사의 인사를 짧게 전했다.

  시계는 3시 15분을 조금 지나고 있다. 내 손길이 두어 번 전화기를 매만지다 만다. 무안에도 지금 비가 내릴까. 예보엔 전국적으로 온다 했으니 그곳에도 비 내릴 공산이 크다. 가슴이 잠시 방망이질을 한다. 언젠가 읽은 시 구절이 퍼뜩 뇌리를 스친다.


  밤 12시에 남자가 전화를 하면

  요부같이 꾸미고

  여우같이 날쌔게 달려가고 싶다

  가서 불꽃 튀는 시선 하나로

  남자의 몸에 불을 댕겨서

  삐거덕 삐거덕 생의 관절을

  꺾게 하고 싶다

  (신달자의 ‘뮤즈와 팜므파탈’ 중 일부)


  밤 12시가 아닌데도 나도 그에게 날쌔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우인가. 요부인가. 돌연한 이 설렘의 진원지를 놓고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황혼녘을 살고 있는 내게 비는 여전히 강한 촉매 역할을 한다. 마른 먼지 풀풀 나던 가슴으로 빗물이 수혈되며 이끼 빛깔 싱그러움이 피어오른다. 그는 왜 하필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그 염천에 애꿎은 비 얘기는 꺼내서…. 

  오래 전 일이지만 비만 오면 내게 전화 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나보다 한참 어린 노총각이었다. 그는 비만 오면 꼭 전화를 해놓곤 용건을 물으면 어눌하게 “비가 와서요.” 했다. 나도 지금 무안으로 전화해서 웬일이냐 물으면 “비가 와서요.”라 대답할까? 아니면 “마침 비 오는 날 오후 세 시라서요.”라 말해볼까.

 

  어느 덧 4시가 훌쩍 넘었다. 빗줄기도 뜸하다. 느슨했던 몸을 소파에서 벌떡 일으킨다. 딱히 할 일도 없건만 나는 막 잠에서 깨어 조반을 준비하는 젊은 주부처럼 서두른다. 잠시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환(幻)에 끌려 1시간 여 월선 서당을 헤매었다. 삐거덕 삐거덕 생의 관절을 끊는 요부는 아니었다. 단지 아름다움에 끌리었을 뿐. 미적 사물을 스치면 인간은 무의식중 고개 돌려 탐미하게 돼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  (15매)

 

 

빗소리 들으며|서당풍경
박 훈장 댁 개, '당구'다. 당구란 서당개라는 뜻이라고.
박훈장은 개집도 이렇게  운치있게 꾸며놓았다. 멋쟁이!

 

오늘 그의 홈피로 가봤더니 이런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출처 : 장미와 미꾸라지
글쓴이 : 애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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