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름
경아 이야기
한 소녀를 알고 있다. 경아(가명)라는, 열세 살짜리 중학생 소녀 가장이다.
경아를 처음 본 것은 1년 전인 작년 6월이었다. 불우 청소년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친구 H의 제안으로 복지관을 통해 경아의 집을 찾아갔다. 의사인 친구는 재정적 후원을 하기로 하고 나는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하기로 역할 분담을 하였다.
당시 경아는 중학교 졸업반인 언니와 초등학교 3학년생인 남동생과 함께 사는 6학년 소녀였다. 아버지는 간암으로, 어머니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들 남매는 몹시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철모르는 막내만이 생면부지의 내 손에 들린 과자 봉지를 호기심 찬 눈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
경아가 사는 집은 이모의 집이었는데, 이모 가족은 선교사로 중국으로 떠나 주택엔 이들 세남매만 살고 있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이들 남매를 찾아가 간식거리나 밑반찬 등을 장만해 주며 아이들과 거리를 좁히려 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큰아이는 좀처럼 곁을 주려하지 않았다. 느낌에 벌써 많이 빗나간 생활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 상황에 내 존재란 괜한 감시나 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달갑지 않은 존재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방문은 비교적 정기적으로 하였지만 때론 연락 없이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큰아이는 번번이 또래의 남녀 친구들과 킥킥거리다 후다닥 방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어떤 날은 담배를 피우며 신분에 맞지 않게 짙은 화장을 하고 있기도 하고, 허벅지가 드러나는 차림으로 노닐고 있기도 했다. 목 언저리엔 민망하리만큼 불긋한 키스마크가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나는 내심 염려스러웠지만 객쩍은 훈계나 늘어놓을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대신 현실적인 문제로 직접 파고 들어가 남학생들과 어울릴 경우 파생될 수 있는 임신 문제라던가, 그럴 경우 대처해야 할 실제적인 방안에 대해 조근조근 일러 주었다.
큰아이는 시종 아무 대꾸 없이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반발심이나 적의감은 내보이지 않았다.
생활비를 보태주고 도시락 찬거리를 만들어 주어도 도무지 곁을 주지 않는 큰애와 달리 경아는 차츰 붙임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이 인사를 하는가 하면, 여름날 고갯길을 오르느라 땀 흘리며 들어서면 냉수라도 갖다 내놓는 살가움을 드러내 보였다.
늘 불안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게 했던 큰아이는 결국 지난겨울 졸업식을 불과 몇 달 앞둔 채 가출을 하고 말았다. 일시 귀국했던 경아 이모의 말로는, 수소문하여 집으로 데려오면 며칠을 못 견디고 다시 집을 나가버리곤 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 경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경아의 음성이 심상치 않았다. 학교에 간 사이, 언니가 자기 남매들 앞으로 후원금을 보내주는 통장을 훔쳐 갔다는 것이었다. 통장의 돈은 경아 남매가 살아가는 생활비인데 동생들을 보살펴야할 언니가 그걸 몽땅 들고 튄 것이다.
나는 즉시 경아에게로 달려갔다. 경아는 제 언니에 대한 원망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아줌마, 난 절대 언니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예요”, 했다가 “그런 언니는 보고 싶지도 않아요.”, 하고는, 나중엔 “언니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모진 말을 뱉기도 했다.
그랬던 경아가 며칠 전엔 웬일로 시종 제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하소한다. 집 나간 언니가 세끼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사는지 걱정 된다며 자못 어른스런 염려를 늘어놓았다. 나는 짐짓 통장을 훔쳐간 언니가 밉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경아는 언니에게 그 통장이 있어 굶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며 되레 다행이란다. 한 수 더 떠 언니에 대한 자랑까지 하였다. 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기 남매를 함부로 괴롭히지 않았는데 요즘은 동네 애들이 자꾸 치근거린다는 거다. 언니가 호통을 한 번 치면 아이들이 꼼작도 못 했는데 자기 말엔 꿈쩍도 안 한다고 아쉬워하였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한줌 원망마저 곰삭혀버린 모양이었다. 경아는 계속 제 언니 얘기를 하였다.
“아줌마, 언니는 우리가 잠들면 밤마다 이불 속에서 몰래 울곤 했어요. 어떤 날은 자다가 엄마를 부르며 눈이 퉁퉁 붓기도 하구요. 언니가 너무 불쌍…….”
미처 말끝을 맺지 못하는 경아의 눈이 발갛게 젖어들었다. 이제 경아가 그 베갯머리를 적실 것이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 경아의 교우 관계를 물어 보았다. 언젠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일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경아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음성도 고조되었다.
“아줌마, 요샌 돈 없으면 친구도 못 사귀어요. 애들이 떡볶이를 사내면 나도 한 번 사줘야 하는데 어디 그런 돈이 있어야죠. 가끔씩 친구들이 여의도로 자전거를 타러 가도 난 그 축에 낄 수가 없는 걸요.”
그러다 보니 자연 가까웠던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아는 새삼 설움이 북받치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줌마, 난 언니가 왜 우리들 통장까지 훔쳐 갔는지 이해가 돼요. 언니를 알 것 같다구요. 돈 없으면 친구도 떨어져 나가는 걸요. 친구마저 없어지는 그 외로움을 언니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경아 역시 은연중 큰아이와 같은 유혹을 느꼈던 걸까. 경아는 어느새 제 언니의 의중을 꿰뚫는 심리학자로 변해 있었다. 경아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엉엉 소리 내며 어깨마저 들썩였다. 나는 경아의 등을 토닥이며 격정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경아, 힘들더라도 부디 지금처럼만 어여쁘게 살아가렴. 그런 네 마음이 있는 한 언니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아줌마는 너를 믿지. 네 예쁜 마음이 언니를 꼭 돌아오게 할 거라고….”
경아가 대답했다.
“아줌마, 저는요 공부엔 취미가 없으니까 일찌감치 미용기술을 배울 거예요. 그래가지고 돈을 열심히 벌 거예요. 동생은 제가 지켜줘야 하잖아요….”
경아는 애써 눈물을 훔치며 포부를 다졌다. 동생이 보이지 않자 경아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밖에서 노닐고 있는 제 동생을 발견하곤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동생의 뒷 잔등을 훑고 있는 경아의 눈빛이 마치 꼬마 어머니처럼 보였다. 어린 동생을 엄마처럼 보살피는 경아이고 보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군가를 보살필 때 많은 성장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경아네 삼남매가 다시 화목하게 보듬으며 살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