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꽃의 파랑

tlsdkssk 2008. 10. 2. 19:26
 

꽃의 파랑

                                                                                                

  빨간 장미꽃다발을 받았다. 소설가 L씨가 대학 선배라는 K선생과 함께 방문하며 건넨 것이다. 천주교 순교성지인 절두산 성당을 가기 위해 잠시 들렀다는데, 이번에도 그는 장미 다발을 안고 왔다.

  ‘꽃을 든 남자’는 ‘꽃을 든 여자’보다 늘 그 이미지가 강열하게 와닿는다. 꽃이 본질적으로 여성성(女性性)을 띠고 있어 그런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는 준수한 젊은이,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예술을 보여주는 듯 삽상하다. 

 

  차를 대접하며,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 장미를 소담하게 꽂았다. 그도 보기가 좋은 듯 흐믓한 표정이다. 꽃은 그 자체가 완벽한 예술이요 판타지, 꽃이기에 꽃다운 파랑(波浪)을 일으킨다. 내 나이가 젊었어도 좋았을 테지만, 중년이 넘어 받아든 꽃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와닿는다. 하물며 그것이 빨간 장미임에랴.

  꽃 재수가 있는지 지난달에도 한 소년에게서 흑장미 한 송이를 받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 장미 다발을 안겨드리고 싶었는데 근처에 화원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느 사무실 로비에 꽂혀 있던 장미 한 송이를 슬쩍 빼왔노라는 소년의 고백에 한참을 마주 보며 웃었다. 혹한의 날씨마저 훈훈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래도록 그 장미 한 송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꽃을 좋아해선가, 아내와의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는 한 지인에게 꽃을 사들고 귀가해보라는 권유를 한 적이 있었다. 한 송이 꽃이 주는 파급 효과를 누누이 설명하며, 꽃(flower)은 라틴어의 ‘flos’에서 유래된 말로 ‘최량의 것’을 뜻한다더라며 아는 체좀 했더니,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는 듯 펄쩍 뛴다. 술기운을 빌리면 사뭇 쉬울 거라 해봐도 역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중년을 넘긴 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은 그런 행위가 도무지 남우세스런 모양이다. 하기야 자칭 애처가임을 내세우는 남편에게도 나는 이제껏 꽃 선물만큼은 받아본 기억이 없지 않은가. 선물은커녕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미니장미 댓 단을 사다가 백자 항아리에 수북 꽂아 놓은 적이 있었다. 종일 내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 꽃이건만, 귀가한 남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혼자 보기 아까워 아름답지 않느냐고 주의를 환기시키자, 남편은 뚝뚝한 목소리로 꽃이란 다 이쁜 것 아니냐며 우문현답을 한다. 내가 한심한 여편네로 보였던가 보다. 진종일 진빠지게 일하다 들어온 남편과 돈 푼도 되지 않는 글이나 끼적이며 꽃을 즐기고 있는 나. 그가 실업(實業)에 매달리는 인간이라면 나는 허업(虛業)이나 즐기는 비생산적 인간이라 볼 수 있겠다.

 

  원로 소설가 L선생은 당신 자신이 작가면서도 예술인들이 무한정 늘어나기만 하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가 아니라고 한다. 요컨데 문화 예술인이란 기본적으로 노니는 사람들, 한판 즐기는 사람들인만큼 그렇다는 것이다. 공감이 간다. 화가 이중섭도 ‘남들은 저렇게 바쁘게 열심히 사는데 나는 그림 그린답시고 놀면서 공밥만 얻어먹고 뒷날 무엇이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며 일절 음식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사르트르 또한 ‘내 글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하고 작가로서의 고뇌를 실토한 바 있었고.

 

  내 경우, 실리(實利) 보다는 탐미(耽美) 쪽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시절에도 돈 몇 푼 들고 장에 갔다가 화초 장수가 보이면 지갑을 달랑 털곤 하였다. 자책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경구를 빌려다 스스로를 변호하곤 하였다. 가정의 파수꾼인 뭇 주부들 눈엔 이런 내가 한량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복부인의 오명을 감수해가며 자산을 증식하고 있을 때에, 야쿠르트 행상을 하며 자식의 과외비를 조달하고 있을 때에 나는 유한족도 아니면서 종교니 예술이니 하며 뜬구름이나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L이 건넨 장미는 며칠 후면 시들어 쓸모없게 될 것이다. 실용가치 면에선 과일이나 여타 식품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내가 쓰는 수필도 거의는 일회성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설령 어느 독자가 관심 있게 읽어준다 한들 장미처럼 잊혀질 운명. 생각하면 서글프다. 그러나 한 송이 꽃으로 피어 누군가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면 그건 복된 일이 아닌가.  

 

  장미를 선물한 L의 마음과 꽃을 가꿔낸 미지의 손길을 떠올려본다. 곱고 탐스러운 한 송이 장미를 위해 그는 성과 열을 다 쏟았으리라. 피워낸 숱한 화초들이 이렇듯 가뭇없이 스러져버림을 알면서도. 하지만 그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꽃이 사람에게 안겨주는 감미로운 파장을. 꽃은 꽃으로밖엔 달리 대신할 수 없는 나름의 절대성을 지녔다는 것을. 이 세상 어느 것도 장미를 대신할 장미일 수는 없다는 게 이 한량의 알량한 변(辯)이라면 변이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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