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얼굴 없는 얼굴

tlsdkssk 2010. 4. 30. 17:08

2006 수필

 

 

                  얼굴 없는 얼굴


                                                           


  예수를 마음 깊이 사랑한 적이 있었다. 신앙의 대상으로라기보다 단지 인간 예수를 흠모한 것 같다. 그것도 붓끝으로 그려진 캘린더 속의 예수를 연모했다. 화가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림의 제목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 로서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장면을 아름답게 담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으며 우리 학교는 미션 스쿨이었고 그 캘린더는 우리 옆 반 교실에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보고 난 뒤 나는 그 예수를 당장이라도 갖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아무도 없을 때 캘린더 한 장을 북 뜯어오고도 싶었지만 그 또한 도둑질이라면 도둑질인데다가 하필 그림의 주인공이 신성한 예수님인지라 차마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다. 한 달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 달의 마지막 날, 나는 혹 나 같은 애가 또 있을 새라 늦도록 학교에 남았다가 오매불망하던 애인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붙여 놓으니 어쩌면 그리도 흡족하던지. 청소년들이 우상처럼 여기는 연예인 사진을 붙여 놓았을 때 기분이 이러할지 모르나 신의 아들 예수가 주었던 그 감동과는 차원이 다를 것 같다.

 

  나는 조석으로 그분께 인사드리며 하루를 보고하고, 비밀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죄를 통회하고, 울고, 웃었다. 그는 신이자 스승이었고 연인이자 오빠이며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내 종교 이외의 것을 이단시 했으며 사후에 만나게 될 예수님의 모습이 더도 덜도 말고 꼭 그 그림 속의 예수님 같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그 그림 속의 청년은 시나브로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예수의 모습이 어딘가 가볍게 느껴져 더 이상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결국 어느 날인가 나는 그 예수를 벽에서 떼어내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유아 시절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오랜 세월 가톨릭의 분위기에 자라온 터라 성화 속에 자라고 성상과 함께 늙어가는 셈이다. 우리 집 안엔 언제나 십자고상을 비롯해 예수나 성모를 모델로 한 성화나 성상이 있었다. 내 신심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모셔져 있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성물(聖物)을 파는 곳에 가면 내 심상에 새겨져 있는 예수나 성모의 이미지에 근접한 작품을 찾아 방안의 성물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엘 그레코, 죠르주 루오 같은 대가의 복제품 예수가 차례로 모셔졌다. 그러기를 수 십여 년.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예수의 모습은 시쳇말로 온화한 꽃미남 스타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세월이 흐르면서 꽃미남적 예수의 이미지는 인류의 문제를 놓고 고뇌하는 신인(神人)으로 변모되었으며 거기서 다시 내가 종교에 대해 고민하고 천착한 만큼 보태지고 감해짐을 반복하며 변화해갔다. 흥미로운 건, 세월이 흐를수록 집안의 성물이나 성화의 수효는 줄어들고 단순하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은연중 기존 예수의 얼굴을 지워내고 있었다.

 

  최근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H동 성당으로 나가게 되었다. 성당이 바뀌면 나는 무엇보다 성당 제대와 중앙의 십자고상(十字苦像)부터 유심히 보게 되는데, H동 성당에 모셔진 예수 상을 대하는 순간 나는 아, 하고 짧은 외마디를 내질렀다. 특이하게도 거기엔 얼굴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얼굴은 있되 이목구비가 없다고나 할까. 어쩌면 희미하게 조각되었을지도 모를 성상의 이목구비가 노안이 된 내 시력 탓에 안보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그 모습이야 말로 내가 찾던 그 얼굴이었던 것이다.

 

  지금껏 보아온 예수의 초상에는 훌륭한 것들이 많았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 혼으로 빚어내고 그려 낸 감동적인 작품들. 나는 그것을 매개로 삶의 행간마다 나의 신을 떠올리고 정신을 신께로 집중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늘 무언가 미흡했다. 신에 대한 관심도가 내 영혼의 뜨락에서 자리를 넓혀 가면 갈수록 그러했다. 하물며 그리도 좋아하던 다빈치나 그레코와 루오의 예수조차 성에 차질 않았다. 그건 다만 그들이 지닌 예수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오늘도 얼굴 없는 예수를 만나고 왔다. 나는 주로 저녁 미사를 가는데, 어둔 조명 때문인지 십자고상은 그리 밝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았다. 무형의 얼굴을 통해 무한의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본디 광대하고 초월적인 것은 인간의 눈으로 잘 헤아려지지 않는 법 아닌가.

  내가 늘 앉는 자리에서 보면 거리감으로 인해 예수의 얼굴은 내 손바닥 만하게 보인다. 그 작은 무형의 형상에 응축된 그 분이 담기어 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 고뇌와 슬픔, 포용과 인내…. 얼굴 없는 그 얼굴은 내겐 때로 부처님처럼도 보이고 관음보살처럼도 보인다.

 

  이따금 거리나 전철 안에서 포교에 열을 올리는 신자들을 만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느니 천주교나 불교 신자들은 구원을 못 받는다느니 하며 불을 토한다. 산다는 건 존엄하면서도 때론 추악하고 치졸하기도 한데 종교 행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그들도 예수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터. 그럼에도 나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종종 중3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그들은 누군가 그려낸 예수만을 열렬히 품고 있는 것 같다. 내 착각일까? <15매>




출처 : 장미와 미꾸라지
글쓴이 : 애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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