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수필
비 오는 날 오후 3시에
비 내리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파초 잎새에 비 듣는 낭만은 없어도 여름 날 오후, 그 한적한 맛이 제법 괜찮다. 오늘은 우요일(雨曜日), 볼 일도, 만날 사람도, 하물며 모처럼 집안일로부터도 자유롭다. 벌렁, 소파에 몸을 눕힌다. 눈과 대칭 방향의 탁상시계에 시선이 멎는다. 시각은 오후 3시. 정확히는 3시가 조금 안됐지만 바늘은 이내 직각을 이룬다. 오후 3시, 비 오는 날 오후 3시다. 돌연 정수리로 차가운 빗줄기 하나가 꽂히는 것 같다. 아, 그 사람!
3년 전 8월 중순, 대녀 안젤라와 함께 호남지방을 떠돌던 때의 일이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뜬구름처럼 흘러 다니던 차에 대녀가 전남 무안의 한 지인 이야기를 꺼내었다. 도심을 떠나 홀로 초야에 묻혀 사는 서당 훈장님이 있으니 잠깐 들러 가자는 거였다. 마침 그쪽과 연락이 잘 닿았다. 나는 허연 수염 풀풀한 어르신인가 했는데 웬걸, 마을 어귀에 나타난 사람은 아직 환갑도 안 지난 젊은이(?)였다. 그는 하이얀 모시 한복에 푸르스름 쪽물 들인 두루마기를 팔에 걸치고 머리엔 양산만한 삿갓을 쓰고 오른 손엔 상반신을 거의 가리울 합죽선을 든 전형적인 한량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온 몸을 서양 명품으로 둘러싼들 지금 내 눈앞의 저 이보다 더 멋스러울까. 반듯한 자세에 걸치고 두른 모든 게 하나도 겉돌지 않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오를 지난 태양은 달군 무쇠 솥처럼 지글거리고 땅은 몸부림치듯 지열을 뿜어냈지만 몸을 놀릴 때 마다 그에게선 살랑살랑 바람이 일었다. 인근 식당으로 차를 몰고 가 점심을 먹고 선생의 거처로 오기까지 그는 한 번도 두루마기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나는 슬몃 장난기가 동했다.
“두루마기는 그냥 폼이신가 봐요.”
“맞습니다. 훈장이니까요.”
그의 웃음엔 익살이 가득하고 살짝, 내 맨 팔뚝 위로 그의 옥색 두루마기 풀기가 스쳐갔다. 가족 떠나 혼자 사는데 모시옷의 푸새는 누가 하느냐 물으니 자신은 ‘독립군’이므로 본인이 다 한다면서 서당의 곳곳을 보여준다. 10년 전 폐가를 구입해 혼자 손을 보았다는 서당은 그 디테일 모두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안목이 여성보다 더 꼼꼼하고 치밀한 것 같았다. 창가의 조촐한 분이며 뜰에 심어놓은 꽃빛깔에도 그가 얼마나 섬세한 심미안을 지닌 사람인가를 느끼게 했다. 진한 감동을 받을 때 그렇듯 나는 그만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의 호는 초암(草庵), 문득 작고하신 원주의 초우(草友) 선생이 상기되었다. 초우 선생이 서구적 자유인이라면 초암 선생은 동양적 자유인, 살아가는 방법이나 외모도 한 사람은 서구적이요, 또 한 사람은 동양적이다. 박 훈장은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즉석에서 화구를 펼쳐 놓고 부채 위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비 오는 날 오후 세시를 좋아한다고 말을 건네 온다. 나는 가만히 그의 붓놀림만 주시할 뿐이다. 한 순간 밑동 굵은 시커먼 가지가 불끈 솟는가 싶더니 뒤이어 매화 송이가 방울방울 달린다. 그의 손길 어느 구석에 매화가 숨어 있다가 저리도 잽싸게 꽃을 피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안이 원주만 같았어도 아마 나는 월선 서당과 그 주인에 끌려 보다 자주 찾아갔을 것이다.
작년 여름, 선생은 아무 예고도 없이 한지에 싼 부채 세 점을 우편으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이번엔 청풍(淸風)과 난과 모란이었다. 보내드린 내 수필집에서 ‘난’과 ‘모란꽃’을 읽고 보낸 것 같다. 나에게 ‘모란 여인’이라 칭해왔다. 전화를 하려다 나는 이메일로 감사의 인사를 짧게 전했다.
시계는 3시 15분을 조금 지나고 있다. 내 손길이 두어 번 전화기를 매만지다 만다. 무안에도 지금 비가 내릴까. 예보엔 전국적으로 온다 했으니 그곳에도 비 내릴 공산이 크다. 가슴이 잠시 방망이질을 한다. 언젠가 읽은 시 구절이 퍼뜩 뇌리를 스친다.
밤 12시에 남자가 전화를 하면
요부같이 꾸미고
여우같이 날쌔게 달려가고 싶다
가서 불꽃 튀는 시선 하나로
남자의 몸에 불을 댕겨서
삐거덕 삐거덕 생의 관절을
꺾게 하고 싶다
(신달자의 ‘뮤즈와 팜므파탈’ 중 일부)
밤 12시가 아닌데도 나도 그에게 날쌔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우인가. 요부인가. 돌연한 이 설렘의 진원지를 놓고 잠시 고개를 갸웃한다. 황혼녘을 살고 있는 내게 비는 여전히 강한 촉매 역할을 한다. 마른 먼지 풀풀 나던 가슴으로 빗물이 수혈되며 이끼 빛깔 싱그러움이 피어오른다. 그는 왜 하필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그 염천에 애꿎은 비 얘기는 꺼내서….
오래 전 일이지만 비만 오면 내게 전화 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나보다 한참 어린 노총각이었다. 그는 비만 오면 꼭 전화를 해놓곤 용건을 물으면 어눌하게 “비가 와서요.” 했다. 나도 지금 무안으로 전화해서 웬일이냐 물으면 “비가 와서요.”라 대답할까? 아니면 “마침 비 오는 날 오후 세 시라서요.”라 말해볼까.
어느 덧 4시가 훌쩍 넘었다. 빗줄기도 뜸하다. 느슨했던 몸을 소파에서 벌떡 일으킨다. 딱히 할 일도 없건만 나는 막 잠에서 깨어 조반을 준비하는 젊은 주부처럼 서두른다. 잠시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환(幻)에 끌려 1시간 여 월선 서당을 헤매었다. 삐거덕 삐거덕 생의 관절을 끊는 요부는 아니었다. 단지 아름다움에 끌리었을 뿐. 미적 사물을 스치면 인간은 무의식중 고개 돌려 탐미하게 돼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 (15매)
오늘 그의 홈피로 가봤더니 이런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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