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쥐다래꽃

tlsdkssk 2007. 6. 21. 22:05
 2000년 6월

                                    

                                                 쥐다래꽃


 

   문서 한 통이 들어와 있다. 외출한 사이 팩시밀리에 수신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쥐다래가 꽃을 대신하여 의사화(疑似花)를 피웠다.

넋을 놓고 바라보노라니 오만상념이 떠오르고 지나간다.

가까이 가서 만져보면 그저 푸른잎이건만 초여름 태양빛을

받기만 하면 형광성 흰빛이 벌과 나비를 부른다.

10미터 거리에서 보면 200미터 것으로 보이고,

오백보(步) 먼 거리에서 바라보면 50미터에서 보는 것처럼 가까이 보이는

알 수 없는 빛, 환상의 꽃. 가깝고도 먼 그녀, 쥐다래꽃 같은 여자…….’

 

  수상(隨想)의 일부인듯, 글을 보낸 이의 망막에 나는 그만 알 수 없는 꽃으로 비쳤던가 보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쥐다래꽃이란다. 

 

 뭇 여성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도 간혹 꽃에 견주어진 적이 있다. 보는 이의 각도나 성별에 따라 그 평가는 사뭇 달랐다. 꽃들은 저마다의 미덕과 특성을 지녀 굳이 우열을 가릴 일이 아니겠으나, 칸나와 흑장미, 수선화와 목련, 국화와 쥐다래 순으로 되었던 것 같다. 그 과분함과 문양의 다채로움을 떠올리면 절로 홍소(哄笑)가 나올 지경이다.

 

  내 이면의 열정과 다혈질을 아는 이는 칸나나 흑장미에 비유한다. 하지만 다소곳이 있으면 수선화나 국화가 되고, 활짝 웃어재끼면 목련으로 피었다가, 멀리 떨어져 꼼짝 않고 있었더니 이번엔 쥐다래다.

 

  몇 해 전 일이다. 오다가다 알게 된 선물코너가 있었다. 노처녀인 가게 주인의 선물 포장술이 독특하여 구경도 할 겸, 근방의 대형 서점에 들를 때면 그녀를 찾아가 함께 커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작은 체구의 그녀는 제법 촉촉한 감성으로 손님을 호리는 재주가 있다.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서려니 그녀가 나를 흘끗 보더니 흑장미 한 송이를 곱게 포장해 건넨다. 그러면서 하는 말, “왠지 흑장미 같아서요.”

 

 그리고 그 몇 달 후, 이번엔 이꽃 저꽃을 바라보다가 노란 소국(小菊) 한다발을 안겨주며, “언제나 국화 같은 분이에요.” 한다.

  그녀는 내게 흑장미를 주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국화면 어떻고 할미꽃, 호박꽃이면 또 어떨까만 동일인인 내가 그녀에게 그처럼 달리 비춰진 것은 자못 흥미로웠다.

 

 새삼 내 안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성과 감성, 소극성과 적극성, 침울성과 명랑성, 내향성과 외향성, 퇴폐성과 순수성, 세속성과 종교성…. 잡다한 모습들이 각기 빳빳한 고집으로 혼재되어 있는 나를 느낀다. 그 다양한 성향들이 만나는 상대에 따라 각기 달리 조합된다. 하여 나는 그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쥐다래꽃. 푸른 잎인 듯 형광의 흰빛을 띄우는 꽃이란다. 10미터 거리에선 200미터쯤 멀어지고, 오백보 먼 거리에서 바라보면 50미터의 것처럼 가까이 보이는 알 수 없는 꽃이란다.

  한 번도 보지는 못했건만 왠지 쥐다래에 호감이 간다. 나도 나를 잘 모를 바에야 타칭(他稱) 자칭(自稱) 쥐다래로 명명함도 좋을 듯 싶다. 쥐다래, 이제 너는 또 하나의 나인 것이다. 아니, 나는 또 하나의 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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