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찔레꽃

tlsdkssk 2007. 6. 21. 21:42
 

수필> 2003년 발표



                                                   찔레꽃

                                                           

                                                                    


   찔레꽃이 하도 고와 꺾으려 한 적이 있었다. 찔레는 그 가지가 어찌나 질긴지 좀체 꺾이질 않았다. 줄기를 비틀었더니 어림없다는 듯 꽃잎부터 떨구었다. 하르르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꽃 이파리라니. 흡사 꽃이 자폭하는 듯 보여 이내 후회를 했다. 향기는 그대로 남긴 채 꽃술만 남은 꽃. 

  내 손엔 어느덧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망연히 보고 있자니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나를 건드리면 찌를 거야. 찌르고 말 거야, 찌를래, 찔레.’

  그래서 찔레라 불렸을까. 가시 지닌 식물이 더러 있지만, 그 어감에서 찔레란 이름의 유래를 알 것만 같았다. 

 

  찔레는 봄철 야산에서 흔히 보는 꽃이다. 향이 좋아 발길이 절로 가지만 멋모르고 손댔다간 나처럼 낭패를 당하기 일쑤. 개화기도 짧아 자칫 시기를 놓치면 다옥했던 꽃 무리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찔레꽃 필 무렵을 ‘찔레꽃머리’라 하고, 모내기철에 드는 가뭄을 ‘찔레꽃가뭄’이라며 찔레를 들먹인다. 봄이면 가장 먼저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는 산수유가 있지만 산수유머리란 말은 없고, 진달래 벚꽃이 그리 고와도 진달래머리나 벚꽃 가뭄이란 말은 듣지 못했다.

 

  찔레의 개화기는 초여름이 시작되는 춘궁기다. 지난 시절 얘기지만, 먹을거리가 궁했던 옛 시절엔 ‘찔레꽃 두 번 필 때 오라비 형제간도 오지 말라’는 말도 다 있었단다. 천지간에 핀 꽃이 어디 찔레뿐일까만 유독 찔레를 지목함은 그 자태와 향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먹지 못해 부황 든 낯으로 바라본 찔레는 유난히도 희디희어 눈이 부셨을 테고, 주린 몸속으로 파고드는 그 진한 향기는 어찔하도록 강렬하고 서러웠을 터. 심정이 서글플 땐 사물의 어떤 아름다움마저도 슬픔의 촉매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찔레는 공해와 가뭄, 추위에 두루 강한 식물로 알려져 있다. 농가주택을 마련한 한 문우는 밭두렁의 찔레 덩굴을 밑동 채 베어냈다고 근황을 전한다.  작물을 늘리려한 의도겠지만, 매몰찬 그의 손길이 조금은 서운했다.

 

  원주의 J 선생은 산방의 찔레가 하도 곱기에 크게 키워보려 했으나 3년만 되면 우죽이 하나같이 말라버리더라 하신다. 그러고 보면 내 기억의 잔상에도 찔레 더미는 죽은 가지와 산가지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우두머리 가지는 제 몸을 죽여 새 가지를 보호하는 수호철망을 자청한 걸까.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궁리인들 못하랴. 살 오른 햇순은 사람들 입에 오르고, 청순한 자태에 뻗는 손길 또한 많았을 테니 억센 줄기와 가시 없이는 살아내기 힘들었을 법 하다.

 

  사람의 얼굴은 보통 그 품성대로 분위기가 풍겨나는데, 찔레는 강한 생명력과 달리 선병질의 여인처럼 해사하고 애련하다. 유(柔)와 강(强)을 한 몸에 지녔다. 꽃을 얼굴에 견준다면 찔레는 단연 외유내강, 그 미색에 가시를 둘렀으리라고 누가 쉬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인간의 경우 대다수에게 다중 적 면모가 숨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식물들도 예외가 아닌 듯 하다. 연약한 듯 모질고, 강건한 듯 유약한 것들을 왕왕 접하게 된다.

  찔레와 달리 나는 외강내유에 가깝다. 외유내강이 아닐 거면 차라리 외강내강일 것을, 찔레만큼도 실속이 없는 것 같아 좀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 안에도 다감한 면이 있다는 걸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내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알고 보니 가시가 고무 가시’라며 웃기도 한다. 허나 상관없다. 다정도 병이라 했으니, 가벼운 인연들이 차단되고 걸러져 간절한 마음들끼리만 닿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언젠가 하얗게 눈 쌓인 겨울 산을 거닐다가 빈 가지에 달려 있는 찔레 열매를 본 적이 있었다. 동글게 맺힌 열매는 또 하나의 꽃이었다. 점점이 뿌려진 피멍울처럼 진한 꽃. 찔레는 인적 끊긴 빈산이 되어질 때야 비로소 못 다한 정염을 남모르게 피우는가? 그렇다면 찔레는 두 얼굴의 꽃이다.

  내 삶의 종장에서 나도 찔레만한 열매를 맺어 다시 한번 꽃 피고 싶다. 그리 되면 인생 끝이 그다지 허망하진 않을 것 같다.

(1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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