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빈대떡 엄마

tlsdkssk 2007. 6. 25. 07:43
 

                                                       

 

                                              빈대떡 엄마  

                                                              

                                                                 

 

  임신 무렵.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냄새를 찾아 나서곤 했다. 단지 하나만의 이유로 버스에 올라 연희동 집에서 신촌 시장까지 행차하였다. 시장 안에는 빈대떡집이 몇 군데 있었다. 나는 늘 단골집을 찾아가 주인할머니가 번철에 부쳐 내는 것을 두 장씩 사먹었다. 허름한 간이 의자에 쭈구리고 앉아서 먹는 빈대떡 맛은 참으로 입안에 쩍쩍 붙었다. 대체 이 몸 어느 구석에 그 맛과 내음에 대한 향수가 숨어 있다가 그렇듯 간절하게 풀려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려서는 빈대떡을 입에 대지 않았다. 명절 때가 되어 빈대떡을 보면, 저 맛없는 걸 왜 해먹나 싶었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가진 뒤 가장 먼저 찾은 별식이 빈대떡이다. 어느 날인가 느닷없이 빈대떡 생각이 났다. 입덧 나면 좋았던 음식도 싫어진다는데, 웬일로 빈대떡 냄새가 스멀거리며 강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집요한 것이어서 나는 근 한 달 가깝게 시장 바닥을 맴돌아야 했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빈대떡을 좋아하였다. 눈에 띄면 먹는 정도가 아니라 종종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니까 임신 때 내가 먹은 빈대떡은 뱃속의 아이가 먹어댄 건지 모른다. 그맘때 나는 입에 대지도 않던 것을 어린것이 저렇게도 밝혀 먹는다니 별스러운 일이었다.

  빈대떡은 불린 녹두를 갈아 만들지만, 녹두 반죽이란 가격이나 만드는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다. 녹두 대신 밀가루나 다른 재료를 쓸 때도 나는 그냥 빈대떡이라 불러주었다. 김치 빈대떡, 감자 빈대떡, 두부 빈대떡, 해물 빈대떡….

 

  빈대떡을 빈자떡이라고도 한다던가. 유래는 다양하나 내게 와 닿는 건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이들의 떡이라는 얘기다. 빈대떡은 본디 기름에 부친 고기를 젯상에 올려놓을 때 밑받침용으로 쓰던 음식인데, 그후 가난한 사람을 위한 먹음직스런 음식으로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엔 흉년이 들면 당시의 세도가나 부잣집에서 빈자떡을 만들어 남대문밖에 모인 유랑민과 거렁뱅이들에게까지 주었다고 하니,  그들에게 빈대떡은 오늘날의 피자나 햄버거만큼이나 먹기 편하고 입맛 당기는 음식이었을 법하다. 

 

  옛 가요에 <빈대떡 신사>라는 옛 노래도 있지만, 내게도 <빈대떡 엄마> 시절이 있었다. 남편은 실직하고, 수중 돈은 말라가고, 아이는 먹을 것을 졸라대던 무렵, 동지섣달 오뉴월 복중을 가리지 않고 정말이지 빈대떡을 열심히도 부쳐대었다. 삼복에 불 앞에서 빈대떡을 부쳐대면 본디 땀을 잘 흘리는 내 얼굴엔 고랑이라도 낼 듯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신산한 삶에 대한 눈물인지 땀 물인지 구별이 안 갔다.

 

 남들은 무슨 때도 아니면서 삼복에 웬 고생이냐, 아무리 자식이 좋아한다지만 염천에 정성도 뻗쳤다는 둥 한마디씩 해댔으나, 심신을 아우르는 나만의 느낌을 그들이 헤아렸을 리 없다. 화기 앞에서 땀과 함께 손을 놀리다 보면, 열기와 진한 기름내에 심란하던 마음은 어느 새 증발되고, 무념무상의 경지로까지 빠져드는 것이었다.  

 

  아이는 빈대떡이라면 입이 헤벌죽해졌고, 나는 재료를 바꿔가며 색다른 빈대떡을 만들어 주었다. 자주 만들다 보니 빈대떡만한 음식도 흔치 않은 것 같았다. 요즘 말로 퓨전이요 질 좋은 패스트푸드 같았다.

 

  그 날도 나는 아들의 귀가시간에 맞추어 빈대떡 반죽을 개고 있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나 죽은 뒤 아들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떠올릴까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어미다. 학문이나 예술에 일가를 이룬 것도, 자식을 여럿 낳아 보란 듯이 잘 키워 낸 것도, 그렇다고 이재에 능해 알토란같은 재산을 모은 것도 아니니 어느 곳간을 보아도 궁색할 뿐이다.

 

 한데도 어쩌자고 가끔은 자식의 가슴에서 저릿하게 되살아나 눈시울을 젖게 하고 싶다는 감상 부른 욕심이 꾸물거렸다. 하지만 반죽 한 국자를 달궈진 팬에 얹는 순간, 치지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망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부질없는 탐심, 차라리 이 내음과 이 맛 속으로나 숨어들 일이다. 언젠가 아들이 장성한 뒤 제 식구들에게 빈대떡 한 장쯤은 일도 아니게 부쳐주며 ‘그 옛날 우리 어머니는…’ 하고 잠시만 추억해주어도 좋을 것을.

 

  요즘도 아들이 집을 찾아 대구로 내려올 때면 먼저 떠오르는 게 빈대떡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일부러 장을 보진 않는다. 냉장고에 있는 것을 썰고 다지고 으깨어 곡분을 섞으면 훌륭한 반죽이 되고, 하릴없이 뒹굴던 것들은 의기투합 상생하며 번듯한 음식으로 되살아나니까. 호박 반개, 두부 반 모, 말라 가던 당근 조각, 무엇도 가리지 않는다. 빈대떡은 빈자떡, 조촐하고도 맛난 떡, 나는 빈대떡 엄마이기에.

 

  어느 훗날, 아들은 빈대떡을 먹다 말고 태중에서부터 맡아왔던 시원(始原)의 냄새를 문득 상기할지 모른다. 내 육신은 이미 가고 없어도 아들은 거기서 제 어미를 만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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