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앨범을 정리하다가 추사 고택에서 찍어온 모란꽃을 보았다. 꽃에 취해 셔터를 연방 눌렀는지 사진이 제법 되었다. 2년 전 봄, 나는 우정 모란이 피기를 기다려 그 고택을 찾았던 것이다.
모란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근래의 일이다. 젊은 시절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가까이 할 기회도 흔치 않았다. 여느 꽃과는 달리 모란은 일부러 찾아나서야 눈에 띄는 꽃에 속했으니까. 그것도 잠시만 피고는 말았으니까.
3년 전 5월, 선배의 집을 방문했다가 정원에 핀 모란을 보게 되었다. 그 뒤론 왠지 모란의 자태가 두고 온 연인마냥 어른거렸다. 모란이 뚝뚝 지고 있을 무렵이라 그 정취가 더 인상에 남았는지 모른다. 다시 보려 하여도 천지에 모란은 이미 흔적이 없어 시인 영랑의 애절한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모란, 하면 먼저 선덕 여왕의 유명한 일화가 떠올라 당연히 향기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었다. 모란은 꽃향기와 풀내음을 섞은 것 같은 은은하면서도 오묘한 체취를 지니고 있었다.
추사 고택의 모란은 향이 너무 짙어 상춘객들이 코를 댔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설 지경이었는데, 나는 웬일로 자신이 무안을 당한 것만 같아 몰려드는 사람들 향해 “조금 떨어져서 향기를 맡으세요, 조금만 떨어지세요.” 하며 애 태우던 기억이 난다.
모란에 반한 뒤론 길을 가다가도 혹여 모란 닮은 여인이 어디 없을까 하여 둘레를 살피곤 한다. 장미나 국화를 연상시키는 여성은 간혹 있었어도 모란을 닮은 여인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서구화의 물결에 따라 품격 있는 동양 미인을 찾아 보기 어려운 때문일 것이다.
모란은 화려한 듯 후덕하며 성정은 귀족적이되 오만함이 없어 보이는 꽃이다. 나이로 치자면 삼십은 필히 넘어야 할 것 같고, 체구는 풍만하되 그윽한 몸매를 지녀야 할 듯싶다. 재물이 없어서도 안 될 터이지만, 그렇다고 부(富)에 겨워 천박한 꼴을 보인다면 단박에 실격. 기왕지사 미인박명의 처연함마저 지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다.
모란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 설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있다. 언감생심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세월이야 여하 간에 모란만큼은 어림없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일이다. 결혼식에 들렀다가 피로연 장소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모르는 여자건만 내 눈은 한참 동안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중 모란에 가까운 풍모를 지닌 듯 했다. 상아같이 흰 피부에 둥그스름한 볼살, 나이는 사십대 전후에 입술 또한 모란의 꽃잎과 같은 짙은 자색의 루즈를 바르고 있으니 안성마춤.
나는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인 듯 지켜보았다. 하지만 한 순간 눈앞에서 모란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모란이 마악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어쩌랴! 모란이라 부르기엔 그녀의 키가 너무 작지 않은가. 훌쩍하니 휘청거리는 모란도 어색하겠으나, 그렇다고 오척 단신 여인을 화중왕(花中王)에 견주기엔 아무래도 역부족. 나는 그만 실망하여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일순, 천지에 모란은 내 눈에서 휘청이며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