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9
자장가를 부르며
밤 8시도 안됐건만 꾸벅꾸벅 잠이 온다. 근래 없던 일이다. 모래땅에 물 스미듯 곧바로 잠에 젖어들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밤잠을 설친 것도, 무리한 가사로 몸이 지친 것도, 발 부르트도록 거리를 배회한 것도, 배불끈히 저녁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요 며칠간은 친구에게 전화 한번 하지 않았다. 오는 전화도 받지도 않았다.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끼니때를 제외하곤 종일토록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한데도 이튿날 6시에 겨우 눈떴으니 10시간을 혼곤히 잔셈. 한데도 성이 덜 찼는지 아침 한 술 뜨고 나서 다시 1시간 반 남짓 더 잤다. 햇살에 맥못추는 눈사람처럼 흐믈거렸다. 이토록 안락한 것이 잠이라면 영영 깨어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한 순간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유가 뭘까.
까닭을 안다. 이 모든 게 그것 때문이다. 두통 같고, 지병 같고, 허기 같은 그것. 파도 같고, 폭우 같고, 땡볕 같은 그것. 치정 같고, 성욕 같고, 배설 같은 그것. 있어도 못살겠고 없어도 못살겠는, 목을 치고 또 쳐도 다시금 살아나는, 떨쳐내면 그리웁고 껴안으면 밤가시 같은, 축복이자 재앙 같은, 드러내어 엄살 피우기도 남우세스러운, 중독 되면 마약처럼 끊기도 고약한 그것 말이다.
지난 봄, 어쭙잖은 책 한 권 엮고 나서 글쓰는 일이 더욱 막막해졌다. 그런 이유로,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청탁 원고마저 고사하고 말았다. 하물며 모지(母誌)에서 청탁이 올 때조차 손놓고 함구했더니 또 다시 청탁서가 날아온다. 거듭되는 청탁서를 받아들고 나니 어미 닭이 새끼 품 듯 챙겨주는 어버이 정만 같아 가슴 찡하면서도, 미납고지서를 받아든 양 편치 않다.
나는 한 번 발표 한 것은 두 번 다시 올리고 싶지 않은 별난 근성을 지닌 데다, 비장의 카드로 내놓을 알토란같은 작품도, 갓 뽑아 올린 따끈한 글발도 없는 터수니 그럴밖에. 옷장 안에 옷 쌓아놓고도 막상 외출하려면 눈에 차는 옷이 없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매양 그 밥에 그 나물일랑 더 이상 먹기도 권하기도 거북하다. 새 물 괴이고 새바람 불기를 기다리지만 글이란 본래 제 영혼 이상의 것을 담아 낼 수가 없다. 허세 부리고 짜깁기로 넘겨본들 예리한 독자는 그 ‘성형발‘에 속지 않는다. 다작을 한 위인도 못되니 진이 빠졌노라 둘러댈 수도 없는 신세, 냉가슴을 앓을 뿐이다.
수필은 글쓴이의 됨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좋은 글귀를 나열하고 인용했다는 것과 그 인격은 별개의 것이므로 점점 힘겹게 여겨진다. 수필가들은 타고난 감성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별것 아닌 것에도 쉽게 감동하고 표현하는 습관이 배어 있는지, 수필 깨나 섭렵한 어느 친구 왈, 수필이 뭔가 했더니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인양 너스레 떠는 것이더라며 웃는다. 물론 명 수필은 제외한 말이었을 줄 안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이냐고 나는 반문했지만, 웃음 섞인 그 일침이 벌침보다 따가웠다. 그와 비슷한 말을 또 다른 이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수필가들의 너스레가 어설펐거나 아니면 제 멋에 겨워 빈 수레 홀로 장광설을 편 글들이 많았던 탓이리라.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문학은 특히 달관과 수려함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천품(賤品)으로 다가온다. 은기(銀器)에 담을 음식은 그에 걸맞아야 할 것이고, 명품을 걸친 사람은 품격도 명품이길 바라는 심정과 흡사하다고 할까. 독자의 입맛은 중도라는 걸 쉽게 허용하지 않으니 알수록 두려운 세계이다.
식당에 갔다가 음식 맛이 신통찮으면, 맛도 제대로 못 내면서 왜 허구 많은 일 중에 하필 음식 장사를 해서 여러 사람 괴롭히나 의아해질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자기 좋아 쓰는 글이야 누가 무어라 하랴만 활자화의 과정은 신중을 기할 일이다. 오죽하면 공해라는 말까지 있을 것인가.
진종일 이런 상념들로 머리가 그들먹했다. 의식은 봉두난발. 진전 없는 소설로 애도 많이 태웠다. 원고 넘기기로 한 날이 닷새도 남지 않았으니, 한숨 한 번 내쉬고 천장 한 번 쳐다보고. 그러니 피곤도 했을 것이다. 마음에 근심 들면 뼈도 마른다했으니 제풀에 지쳐 잠이 쏟아질 법 한 일이다.
정오 무렵,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온 한 지인이 잘 지내느냐 묻는다. 사는 것이 엄청 즐겁노라 대답하자, 듣던 중 반갑단다. 하기야 좀 복된 삶인가. 평생을 사모해도 모자랄 님 끌어안고 허구한 날 사랑타령. 쪽쪽 입 맞추고, 으스러져라 부둥켜안고, 앵돌아져 울먹이다 다시 돌아 부여잡고.,,
그 님은 내가 싫다면 언제라도 고이 돌아설 귀골(貴骨)이니 걸릴 게 무엇인가.
분명한 건 그 님께 한 생을 걸어도 좋을 거란 확신을 버릴 수 없다는 거다. 그 믿음이 고맙고도 야속하다. 울리고 들뜨게 하고, 병 주고 약 준다. 그 품에 한 몸 틀어박고 무말랭이 쪼글어들듯, 시래기 바수어지듯 사그러진다 해도 후회는 않을 것이다. 아니 열 번 절이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 님이 있어 푸닥거리 한 생, 저무는 줄 모르고 열 내어 즐겼다면 영면에 들 때엔 뒤척임 없이 쉬이 잠들 게 아닌가. 꿀맛 같은 잠에 들리라.
오늘도 허탕이다. 상관없는 일이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해는 다시 떠오를 것이니 잠이나 자자. 잠이나 자두자. 아, 사지가 풀려오며 펼쳐지는 비몽사몽의 감미, 미혹하는 잠의 손길이 더없이 다정하다. 자장가라도 불러주련?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