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예외적 인간

tlsdkssk 2007. 4. 11. 19:47

  4년 전쯤 발표한 글이다.

문득 그 교수님 얼굴이 떠올라 이 글을 옮겨본다.                                      


                                                      

                                         예외적 인간               


  즐겨 읽는 책 중에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있다. 책이란 거의가 일회 적으로 끝나기 마련이나 이 책만은 무시로 펼치곤 한다. 소설이 아니니 아무 페이지나 넘겨도 좋고, 임어당과 무언의 토론을 해보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연필부터 쥐는 습성이 있다. 나름대로 문학성, 잔재미성, 사회성, 철학성, 상식성… 등으로 분류하며 밑줄을 긋는다. 오랜 시간 낚시 대를 걸고 있어도 피라미 한 마리 못 잡는 날은 몹시도 허전하나, <생활의 발견>처럼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서 몇 번이고 읽게 되는 보배로운 책도 있다.   

  오늘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만일 단종(斷種)이라는 걸 나라의 정책으로 행한다면,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사람, 정감이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 냉혹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사람,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냉혈한, 또는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흥취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우선 단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대목엔 작으만치 네 가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가. 연필에, 볼펜에, 형광펜에. 그것도 모자랐는지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사람’이란 구절엔 웬일로 굵은 밑줄과 함께 ☆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임어당다운 해학과 촌철살인의 명구라고 여긴 때문이었을 게다. 그게 아니라면 무절제한 자연 개발과 미관을 해치는 간판과 건축물, 유명 사찰 부근에 늘어선 천박한 상가들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임어당의 말에 거듭거듭 공감을 표하며 그렇게 혼자 분을 삭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여느 자질은 다 갖추었으되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깊이 빠져들진 못할 것 같다. 이제껏 내가 좋아한 사람들은 일단 미적 감각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한 예외적 인간이 있긴 하였다. 

 

  잠시 대구에 머물 때의 일이다. 재충전을 한다고 모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강사는 국어교육학과 교수님인데, 처음 뵙는 순간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깡마르고 작은 키에 무말랭이 같은 얼굴, 눈을 자주 꿈적거려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증을 일으키는 교수님의 짝눈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가 된 건 그분의 옷차림이었는데, 입고 있는 양복과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철저히 부조화를 이룬 채 제각각 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의 ‘막가파’적 의상 연출은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어느 날은 숫제 후줄구레한 점퍼에 색깔도 엉뚱한 넥타이를 매고 오시어 예전의 복덕방 영감님이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교수님께 빠져들기 시작했다.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지성, 배꼽을 쥐게 하는 유머 감각과 인품의 따듯함이 심포니처럼 어우러져 매 수업마다 우리를 감동시킨 때문이었다.

 

  수강생들이 과제를 해오지 않을 때면 칼 같은 꾸중을 하시면서도 억양만은 구수하게 포장하여 내놓는 달변에 반해선가, 1년이 다 될 무렵엔  ‘××× 교주님’이라 부를 만큼 모두들 교수님께 깊이 매료되었다. 게 중 몇 사람은 은근히 교수님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교수님 같은 분을 친구로 둔다면 삶의 윤기가 돌 거라는 얘기였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가 공감할 일이었다.

 

  한 용감한 여성은 교수님께 공개적 구애(求愛)를 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어, 그녀의 황당한 접근과 교수님의 능란한 방어를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곤 했다.

마침내 강의가 다 끝나고 종강 파티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이 무 자르듯 강의실을 떠난다는 것, 수강생들과 회식도 일절 사양한다는 것, 연구실엔 절대 여성 혼자 출입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마지막 고백을 노골적으로 해왔다. 교수님 생각이 자꾸만 난다는 둥, 사모한다는 둥…. 교수님은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 사춘기는 5년 전에 이미 다 끝났습니다.”

  강의실엔 폭소가 터졌고, 웃음이 잦아들 무렵 교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수님을 만난 이후 나는 그 교수님처럼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인간은 어찌 해야 좋겠는가 하고 오지랖 넓은 고민을 하곤 한다. 임어당이 말한 미의 범주도 문제거니와, 아무래도 해법이 간단치 않을 것 같아서다. 절대자가 인간을 심판할 때도 그와 유사한 현상이 빚어지지 않을까. 가령 도덕적으론 무감각했으나, 미적 감각이 뛰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했고 흥취 속에 살다간 사람이 있다면 이런 인간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임어당 어르신, 어찌 하면 좋을까요? 혹 그 교수님은 역설적 미학을 구사하신 게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일단은 그분을 예외적 인간으로 분류하렵니다. OK?  ( 1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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