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부레 옥잠이 있는 연못

tlsdkssk 2007. 1. 10. 21:19
 

2004년



                         부레옥잠이 있는 연못 


                                                       

                                                                          



  나는 지금 부레옥잠 연못가에 호젓이 앉아 있다. 함초롬한 수초는 물 위에 한가롭고, 어느 새 하늘 한 점 내려와 그 곁에 머문다. 못가에 앉았으려니 낯익은 아이의 속살거림이 들려오는 듯 하다.

                                                           *

  나는요, 초등학교 4학년.

  연못 있는 집을 꿈꾸었습니다. 잎새마다 풍선 달린 부레옥잠이 떠 있고, 수초 사이론 고기들이 숨바꼭질 하는, 그런 연못 말이에요.

우린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고 있어 연못을 만들 수가 없었어요. 궁리 끝에 학교 앞에서 금붕어 한 마리를 사왔는데, 엄만 대뜸 핀잔부터 주시더군요.

"그걸 어디가 키워? 두고 봐라, 금방 죽고 말테니."

엄마는 금붕어가 죽기를 바라나 봅니다. 나는 말없이 금붕어를 대접에 풀어 놓았습니다. 구박데기 금붕어가 무척 외롭고 불쌍해 보였습니다.

 

  나는 수돗물을 갈아 앉혔다가 매일 매일 금붕어 물을 갈아 주었습니다. 밥알을 씹어 먹이로 주고 이따금 멸치가루도 넣어 주고요. 금붕어는 내 정성을 아는지 기다란 똥도 싸며 잘만 살았답니다. 

  식구들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어느 날 아빠는 예고도 없이 아주 큰 어항을 사오셨지 뭐예요. 물론 금붕어도 여러 마리요. 난 터질 듯 기뻤어요. 내 금붕어가 얼마나 행복했겠냐구요.

 

  이튿날, 나는 학교 앞에서 다시 부레옥잠을 사왔습니다. 금붕어를 사던 날 사고 싶었는데 이제사 소원을 이룬 거지요. 부레옥잠을 어항에 넣자 금붕어들은 신이 나서 수초 사이로 요리조리 돌아다녔어요. 어떤 놈은 뿌리를 뜯어 먹고, 또 어떤 놈은 가만히 숨어 있기도 하고……. 

                                                                     *

   은행 다녀오는 길에 화원에서 부레옥잠을 보았다. 순간 발길이 붙박이듯 멈춰졌다. 부레옥잠을 사가고 싶었으나 화원 주인은 없고 잠시 비운다는 메모만 보였다. 다시 와도 될 것을 나는 한 시간이나 기다려 그예 부레옥잠을 사들고서야 집으로 왔다. 

 

  돌아온 즉시 커다란 유리 볼에 물을 붓고 부레옥잠을 띄워 베란다에 내 놓았다. 묻혀온 개구리밥도 덩달아 뜨며 이내 작은 못을 이룬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가슴에 옹달샘 같은 기쁨이 오롯이 고인다. 이만하면 1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충분하다 싶었다. 연못이 생겼으니 이제 필요한 건 금붕어다. 초등학교 시절엔 금붕어부터 샀는데 이번엔 순서가 바뀌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어린 애처럼 안달이 났다. 동네를 다 뒤져서라도 얼른 금붕어를 사 넣고 싶었다. 땀 깨나 흘리고는 결국 수족관을 찾아내었다. 가게 문을 밀치며 금붕어 두 마리만 달라고 하자 수족관 아저씨가 빙긋 웃었다.

 

  “두 마리요? 아이 줄 건가요?”

  나는 천연스레 대답했다.

  “네, 우리 아이가 사오래요. 오랫동안 죽지 않을 튼튼한 놈으로요.”

 

  어항이 크지 않다고 하자, 아저씨는 ‘백운산’이란 작은 고기를 권했다. 중국 백운산 계류에서 자라는 놈이라는데, 잔멸치 만한 몸뚱이는 첫 물 들인 봉숭아 색이요, 지느러미는 세 번 거푸 들인 진 봉숭아 색이다. 촐랑대는 꼴이 그렇게 귀엽고 활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 종류의 열대어 10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못 안에 고기를 풀고 작은 화초를 둘러놓자 어항은 주위 식물과 어우러져 금세 그럴싸한 연못으로 변했다. 품에 답싹 안기는 미니어처 연못이 주는 기쁨이 이리 클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행복이란 것 역시 덩치가 너무 크면 이런 잔재미는 못 누리는 게 아닐까.

 

  사물을 관상할 때 그 대상이 커지면 초점은 분산되기 십상이다. 시선을 압도할 순 있겠으나 몰입하기가 어렵다. 작은 것의 매력에 푹 젖다보니,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마이크로의 세계가 주는 신비경이나 일본인의 축소 지향적 취미를 알 것도 같았다.

 

  작은 놈들이라 그런지 내 눈엔 고기들이 하나도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못이다. 돌도 수초도 하늘도.

  크고 작음이 상대적인 거라면 굳이 차고 넘쳐야 할 이유도 없을 터. 미처 이루지 못한 소망을 미니어처로 만든다면 못 이룰 꿈도 별로 없을 것만 같다. 

 

  뒷손질을 마친 나는 반시간도 넘게 못가에 앉아 있었다. 나와 내가 함께 한 셈이다. 인간에겐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구석이 있는지, 수십 년 간극을 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우 닮아 보였다. 

  “나는요, 연못 있는 집을 꿈꾸었어요. 부레 옥잠이 있는…….”

  어린 나는 재잘대고,

  “그래, 넌 꿈을 이루었구나.”

  황혼의 나는 화답했다. (14매)


 

 


   

   

             

                    

'민혜의 골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라꽃 향기  (0) 2007.04.11
예외적 인간  (0) 2007.04.11
여자의 세 시기  (0) 2007.01.04
투명첼로  (0) 2007.01.04
신의 웃음  (0) 2007.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