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여자의 세 시기

tlsdkssk 2007. 1. 4. 21:03
 

                                  여자의 세 시기



  한 노파가 고개를 떨군채 매우 섧게 울고 있다. 잿빛 머리결, 구부정한 어깨에 촛농처럼 흘러내린 쭈그레한 젖가슴, 볼품없이 튀어 나온 아랫배와 장작개비 같은 팔뚝, 그 팔과 목 언저리엔 푸른 정맥이 지렁이처럼 불거져 있다.

 

  어째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녀가 더욱 가련히 보이는 건, 바로 옆 젊은 여인의 눈부신 미모와 함께 이 여인 품에 안겨 천상 단잠에 젖은 여아(女兒)가 현저한 대비를 이루는 까닭이다.

  이 묘령의 여자. 굽이굽이 흐르는 불론드의 머릿결, 실핏줄까지 드러나 보일 듯 맑고 투명한 피부, 양볼에 흐르는 능금빛 홍조, 두 눈을 살폿이 감고 있는 표정이란 가히 몽환적이다.

 

  ‘여자의 세 시기’라는 제명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이 누드화는, 여성의 생을 세 시기로 나누어 절정과 쇠락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서 미와 충격을 동시에 안겨준다. 소녀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윽한 장미향이 묻어나는 것 같다. 감미로운 소프트 크림을 한 입 베어문 기분이다. 르느아르의 여인들이 아름답고, 고야의 ‘사바사 가르시아’를 보고 반한 적이 있지만, 근래엔 이 여인에게 빠져 자주 들여다 보곤 한다.

 

  며칠 전이다. 같은 일터의 사회복지사 한 선생이, 그 나이에도 모습이 매우 여성적이라고 추켜대면서 한 마디를 덧붙친다.

  “선생님 연세쯤 되면 대체로 여성들이 중성처럼 보이거든요.”

 

  하긴 아직 풋풋한 그녀가 중년의 나를 보는 느낌은 자신에게 좀체 와닿지 않을 듯 아득하게 여겨지리라. 그 무렵의 나 역시 사십 넘은 여자들은 대체 무슨 낙으로 사나, 그 나이에도 여자에게 아름다움이란 게 풍길까, 연정도 가능할까 운운 하며 함부로 떠벌였으니 웃어나 줄 수 밖에.

 

  노(老)의 비애는 외양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학습 능력은 60세 경엔 11세 전후와 비슷해지고, 70세가 되면 10세 이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상식이나 판단력, 오래된 기억 등은 비교적 유지가 잘 되지만, 과거의 경험이나 기억으로 살아가려 하기에 고집이 세어지고 변화하는 현실에의 적응이 어렵다는 것이다.

풍모를 잃는 대신 지혜나 위엄이 그 자리를 채워주면 좋겠는데, 인간의 성숙과 기능이 연륜과 함수관계를 이루는 것만도 아니니 이중의 상실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시절, 불의의 사고로 가족들의 생사 위기를 적잖이 겪어선가 자식이 다 크기도 전에 돌연사 할까봐 몹시 걱정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 강박의 세월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두려움의 실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대응한 덕이었다.

나는 가끔 어린 아들을 불러 놓고, 사람에겐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음을 일러두는가 하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은밀히 유언장을 첨삭해가며 죽음이 내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마음의 무장을 하곤 했다.

 

  이제 아들애가 성인이 되고 나니, 설사 머지않아 죽음이 온다 해도 그리 애석할 일은 없을 것 같은 여유마저 생긴다. 아직 죽음이 멀게 느껴지는 착각이 빚어낸 결과일 수 있겠다. 혹은 미구에 닥치고 말 노추에 대한 곤혹감으로 적당한 나이에 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약삭빠른 타협을 한 건지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엔 어쩐지 동의하고 싶지 않으니까.

 

  클림트가 표현한 시기대로 나눈다면 나는 지금 그 어느 시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장미뺨의 여인은 아니지만 노파처럼 늙어 있지도 않다. 분명한 건 나도 곧 이어 노인이 된다는 사실 일 뿐.

 

  울고 있는 할머니를 다시 바라본다. 노(老)의 서글픔에 어찌 남녀 구분이 있을까만, 흔히 여성을 꽃에 견주었으니 그 애상함은 아무래도 여자 쪽이 더하지 않을 까 싶다. 그녀의 추레한 몰골이 싫었던지 화상(畵商)에서 볼 수 있는 클림트의 복제화엔 여인의 두 시기만이 인쇄되어 있는 게 많다. 노파를 등장시킴으로서 메세지 전달 효과는 있을지 모를망정 보는 이로 하여금 삶에의 열패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여겼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든다. 생멸함이 기왕의 정한 이치라면, 생에 대한 인간의 절대 욕망을 시나브로 잠식해 가는 심신의 쇠잔이야말로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 아닐까 하는. 그건 곧, 언젠가 가공(可恐)의 어둔 터널을 거쳐야 하는 인간을 위해 고안된 조물주의 뜻깊은 섭리는 아니었겠는지. 나는 노(老)의 의미를 갑작스레 날아드는 죽음의 횡액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배려된 완충막이라 해석하고 싶다. 죽음을 죽음답게 맞기 위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늙어져야 하는 존재임을 수용하고 싶다.

 

  만약 우리에게 노경이 찾아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저 싱그러운 모습인 채로, 저 피 끓는 청춘인 채로 사라져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더 가혹한 형벌일 것인가. 마른가지 꺾이기도 그토록 버겁거늘 그건 하물며 생가지를 찢기는 일 아닌가.

  나는 클림트의 노파마냥 울지는 않으련다. 봉선화 꽃물 짙은 석양속으로 마른 꽃잎 나부끼며 말없이 저물련다.

13매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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