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신의 웃음

tlsdkssk 2007. 1. 4. 20:50
  

          

                          신의 웃음


                                                        


   예수의 호탕한 웃음은 정말 의외였다. 게다가 장돌뱅이 같은 차림에 더벅머리를 한 예수는 지금껏 보아왔던 준수한 성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의 모습은 역시 십자가에 달리어 비탄에 젖었거나, 혹은 인자하고도 그윽한 눈길을 하고 있는 서구적 모습이 익숙하다. 

 

  TV 채널을 돌리다 불시에 접한 영화 속의 예수. 그 별난 예수를 마저 감상할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일이 있어 일부밖에 보지 못했지만 지금껏 보아온 여느 예수 영화와는 아주 다른 영화였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다고 한다. 예수의 고난을 되새기기에 더 없는 영화라는데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나는 열심한 크리스챤도 아니면서 영상에 예수의 그림자만 비쳐도 콧날이 시큰한 적이 많았다. 그러니 이 영화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극 사실주의 기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니 왕성한 조건반사를 일으키며 두 눈은 홍수를 이루고 가슴은 터질 듯 조여 올 게다. 

 

  대신, 제목도 모르고 잠깐 보았던 그 영화만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예수의 사랑과 고뇌는 적잖이 보고 들어왔으나 그의 웃음은 본 적이 없어 선가 되레 콧날이 시큰해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웃는데, 내 눈엔 물기가 고였다. 맞아, 예수님이 웃음에 인색했을 리 없어. 반가움과 공감으로 혼자 말을 중얼거리며….

 

   20여 년 전, 한 동네에 살았던 어느 교우의 얘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자. 그 노인은 세례를 받은 지 오래임에도 도무지 경건함이라곤 없어 보였다. 새벽마다 미사엔 참례했으나 고해성사를 본다거나 기도하는 모습은 좀처럼 눈에 띠지 않았다. 또한 동네 교우의 초상집이나 기부금 행사엔 번번이 빠지면서도 술좌석이 벌어지는 곳에는 즐겨 참석하였다. 내게 비친 모습이 그러했지만 그 분의 자평(自評)이기도 하다. 엄숙히 기도하는 신자 곁에서 무슨 기도를 그리 길게 하느냐, 하느님 귀 아프실 테니 짧게 하라며 훼방까지 놓았던 악동 할아버지였다.

 

  하루는 내가, 성당에 오면 가장 먼저 무어라고 기도드리느냐고 물었다. 그는 ‘죄인 또 왔노라’고 간단히 한 말씀 올린 다음, 어떤 신자가 예쁜지 살핀다며 웃었다. 남들이 눈감고 기도하는 시간에도 곧잘 눈을 뜨고 어떤 신자가 열심한가 둘러본다는 것이다.

 

  돌이킬수록 멋쩍으나, 나는 그 죄인(?)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신에게 기도드리곤 했다. 그가 회개하여 착실한 신앙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한데 신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홍소나 날리고 계셨는지 내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백 살을 넘긴 이즈막에 돌이켜보니, 그 노인은 한풀의 위악(僞惡)을 액세서리마냥 달고 다니며 해학을 즐겼던 분이 아니었나 싶다. 신도 그 익살을 보는 것이 유쾌하셨을 것 같다. 한 인간의 모습이 세월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걸 보면 나이를 먹어가는 일도 그리 서글픈 일만은 아닌 듯하다.

 

  그리스 신들 같은 인간미 넘치는 신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믿고 상상했던 신들은 거의가 지엄과 근엄으로만 일관했다. 인간들이 말썽이나 저지르며 신의 복장을 태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들이란 본디 남들 보지 않는데 숨어 등 돌리며 웃는 걸까. 아무튼 웃지 않는 신의 초상을 평생 간직하고 산다는 건 입 꾹 다문 독재자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고역스런 일이다. 신도 웃음 잃은 인간을 따분해하실 것처럼 인간 역시 웃음 없는 신과 평생 동거한다는 건 참으로 지리하고 오금 저리는 일일 테니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지만 인간 역시 무수한 신들을 창조해 냈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신상(神像)을 지닌 신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들이 믿는 신은 전지 전능성만 사람과 구별될 뿐, 때론 밴댕이 속처럼 편협하여 세상을 이간시키고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A의 신은 자기 교파만을 구원하는 외곬, B의 신은 만인에게 가슴이 열려 있는 개방파, C의 신은…. 

 

  그런 이유로, 신이란 인간들이 가둬 놓은 틀 안에서 살고 있는 가상의 초월자인 동시 인간의 내적 성장과 진보에 발맞추어 행진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한데 호모사피엔스는 무슨 근거로 신에게서 해학과 웃음을 없앤 것일까.

해학이란 여유이고, 여유란 삶의 관조에서 울어나는 것이라면, 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건 곧 인간의 투영이 아니겠는지.

장님 코끼리 더듬듯 신의 털끝을 건드리고 있는 이 시건방진 행태를 두고 신은 노하실지 모르겠지만 유대의 속담엔 이런 말도 있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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