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어머니의 어머니
어스름 달밤이다. 모처럼 친정에 들러 어머니와 한 이불에 누웠다. 어머니는 웬일로 이제껏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외조부모님의 숨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외조부는 학문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땅 일구며 논마지기 늘려 가는 일보다는 공부에 뜻을 두었다. 그 염(念)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몇 차례나 집을 떠나 서울에 몸을 숨기셨단다. 외조부는 4형제 중 둘째인데, 그 아버님은 유독 둘째만을 총애하여 잠적한 자식을 번번이 찾아내었다. 효자였던 외조부는 결국 아버님의 애원을 외면할 수가 없었고, 끝내는 향리로 돌아와 학자도 농부도 되지 못한 당신의 반편이 삶을 평생 한스러워하셨다는 게다.
어머니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할아버진 술 한 잔 들어가면 곧잘 시조를 읊곤 하셨지. 인물이 좋으셔서 주막의 주모들이 할아버지에게 흠뻑 빠져들곤 했어. 술이 과하신 날엔 효도가 당신의 꿈을 앗아갔다고,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인생이라고 사랑에서 홀로 우시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슬며시 나를 불러 주막집 주모를 불러들였단다. 캄캄한 밤, 고샅길 지나 주막까지 가려면 얼마나 무섭던지 등골이 다 오싹했지. 젊은 주모는 심부름 온 내게 엿이나 사탕을 쥐어 주곤 했어. 그 재미에 무서워도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지 뭐냐. 내 위로 멀쩡한 언니가 둘이나 있었건만 왜 어린 나에게만 심부름을 시키셨는지 그때는 잘 몰랐어.”
내가 외할머니를 처음 뵌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피난 시절에 외가에 몇 개월 머물렀다고 하나 기억 속의 할머니는 초등학교 시절의 그 모습뿐이다.
여름 방학이 되면 나는 이종 사촌 오빠들과 시골 외가에 가곤 했다. 말씀이라곤 없는 할아버지는 “왔느냐?” 한 마디뿐 도무지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셨고, 할머니는 우리를 살갑게 대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에게 곁을 주지 못했다. 호릿한 체구의 할머니가 시골노인답지 않게 깔끔한 까닭도 있었지만 보다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꽃을 좋아해 외가에 갈 적마다 산야를 헤집으며 풀꽃들에 잠겨 노닐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나는 뒷산에 올라 산나리를 한 아름 꺾어 가지고 왔다. 꽂으려 하니 화병이 없었다. 집은 비어 있고, 광에 빈 병 하나가 있기에 생각 없이 그 병에 꽃을 꽂아 놓고는 냇가로 나갔다.
얼마 후 돌아와 보니 나리꽃이 마당에 버려진 채 시들어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버리셨다는 거였다. 유리병이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그깟 널린 풀 따위가 꽂혀 있는 게 가당키나 했을까만, 어린 나는 그런 할머니를 헤아릴 길 없었다. 내게 한 말씀만 하고 버렸어도 좋았을 것을 어찌 저리 매정하게 팽겨쳤을까 싶었다. 아니, 내 존재가 마당 구석에 무참히 던져진 것 같아 할머니가 몹시 미웠다.
그 날 이후 외가에 갈 일은 드물어졌고, 응석 한 번 변변히 부려보지 못한 채 할머니는 이 세상을 뜨셨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웬일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 눈 앞엔 그 때의 나리꽃이 선연하기만 한데 어머니는 다음 말을 이으셨다.
“그 주모가 떠나자 이번엔 마을의 젊은 과부를 불러들이셨어. 할아버지가 워낙 엄하기도 했지만, 할머닌 할아버지께 정말 지극 정성이셨다. 사랑채로 여자가 들어가면 할머니는 외삼촌을 업고 마당을 한없이 왔다 갔다 하셨지. 흰 저고리에 잿물들인 치마를 입고 넓직한 행주치마를 그 위에 두르신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할머닌 사랑 근처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시곤 방의 불이 꺼지면 돌아서 혼자 우셨어. 그래도 난 아무 영문을 몰랐으니….”
나는 잠시 멈칫하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밤이라도 지샐 것 같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시나브로 잦아들더니 이내 얕은 콧소리만 귓전에 들려왔다. 시큰한 옛 얘기에 잠은 저만치 달아나고, 눈앞엔 할머니의 환영만이 어른거렸다.
은빛 월광 아래 초조히 마당을 서성이는 한 여인이 보인다. 몽환적 달빛은 그녀의 무명 저고리를 적시고, 등에 업힌 막둥이는 어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칭얼거리고 있다. 이윽고 사랑(舍廊)의 불이 꺼지는가 싶더니 여인은 시린 달빛을 향해 불덩이 가슴을 내 쏟는다. 눈물이 번득이는 그 얼굴은 달빛으로 더욱 비감해 보인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을 손수 들인 여인은 밤이 이울도록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참으로 속없었던 분이다. 처용(處容)은 아름다운 제 아내와 동침하는 역신(疫神)을 보며 체념 어린 결단으로 수용했다지만, 할머닌 한 수 더 떠 지아비 곁에 외간 여자의 두 다리를 엮어 놓았다. 그리하여 처용처럼 ‘둘은 뉘해언고(둘은 누구의 것인고)’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역신이 처용의 노래에 물러갔다면 외조부의 여인들은 지어미의 애틋함에 물러섰을 터. 아니, 할머니의 서릿발 같은 기상에 지레 뒷걸음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조부가 첩실을 거느리며 사셨단 얘기는 내 평생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옛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지녔다면, 나의 할머니는 여필종부의 덕과 당신의 자존감을 지키려 가슴의 은장도를 지니셨던 게 아니었나 싶다.
세상이 변하여 요즘엔 배우자의 부정으로 파경에 이르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허나 제아무리 시대가 변한들 사람의 무게와 품격이야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때로 내 외할머니의 전근대적 모습에서 초현대적 여성성(女性性)이 느껴질 때가 있다. 고졸(古拙)한 골동품이 어떤 시각에선 되레 첨단의 감각으로 와닿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푸른 달밤, 그 달빛 아래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임종시조차 멀뚱했던 눈시울이 뒤늦게 젖어든다.
'민혜의 골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투명첼로 (0) | 2007.01.04 |
---|---|
신의 웃음 (0) | 2007.01.04 |
나무 지팡이 (0) | 2007.01.04 |
작은 산에서 길을 잃다 (0) | 2006.07.22 |
그리운 것은 별처럼 멀다 (0) | 2006.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