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가는 날이다.
나는 그 언저리를 네번이나 갔었지만,
번번이 산만 쳐다보다 왔기에 출발 전 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
밤을 달려 영암에 닿은 것은 새벽 3시 반.
버스는 도갑사 인근에 등산객들을 풀어 놓았다.
도갑사에 도착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쏟아져 내릴 듯 촘촘한 별들이 밤새 기다린 듯
저마다 반짝이며 나를 맞아준다.
국자 모양 북두칠성이 어찌나 선명한지 일행을 퍼담아 갈듯 가까이 보인다.
산사의 타종 소리를 들으며 산행이 시작되었다.
인적 없는 칠흑의 산은 렌턴빛에 화들짝 놀라 길을 비껴준다.
새벽 산행이라 당연히 추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기는 군불이라도 지펴놓은 듯 안온하여
껴입은 옷이 오히려 짐스러웠다.
바위와 돌길만이 펼쳐진 도갑산은
별들을 바라보고 싶은 내게 안타까움만 불러 일으킨다.
머리 위의 별들이 소리를 지르는 듯 하다.
"별밭은 놔두고 돌밭만 보고 가니?"
산을 오르며 나는 틈틈이 별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별들도 깜빡깜빡 윙크를 한다.
뒤를 돌아 보니 저 멀리 인가의 불빛들도
주홍빛으로 함께 반짝인다.
문득 어릴 적에 보았던 시골 외할머니네
아궁이가 생각났다.
인가의 불빛은, 군불 지핀 불이 사위어 갈 때
어둔 아궁이 속에서 가물거리던 불씨들을 닮았다.
끄으름으로 시커멓던 아궁이 입,
그 속에서 가물대던 주홍빛 불씨들.
나는 군불 한 번 때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할머니나 외숙모는 한 번도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늘엔 별빛,
저 멀리엔 불빛,
돌밭엔 랜턴빛.
세가지 빛들이 명멸하며 빛들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그중 가장 간절하고도 그리운 것은 역시 저 멀고도 먼 별빛이다.
그러나 그리운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늘에 무수한 별이 저리 빛나도
지금 당장 나를 지켜주는 건 작고 초라한 랜턴이다.
그렇지, 산다는 것도 이와 비슷할지 몰라.
저 별중의 하나를 따온들, 어쩌면 그건
싸늘하고 모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별빛이란 실은 일루젼(illusion)이야.
인가나 시내의 불빛이 저리 아름다워도
그 불빛 아래 벌어지는 사연은 신산하고 구차스럽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세상의 부귀,명성, 성공,사랑...
모든 것은 별처럼 멀고 잡히지 않는다.
별들을 뒤로 하고 랜턴에 의지해 나는 돌밭을 바라본다.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제멋대로 박혀 있는
바위와 돌밭에 넘어지지 않고 통천문을 지나
무사히 천황봉에 이르는 일일 뿐이잖는가.
그래, 산다는 건 늘 현재성을 의미하는 거야.
지금 자신의 코 앞에 닥친 일.
지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이야.
나는 비로소 별빛을 제치고 통천문을 향해 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월출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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