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작은 산에서 길을 잃다

tlsdkssk 2006. 7. 22. 11:51

친구의 원고를 봐주기 위해 용인에서 하루를 묶고 왔다.

65평 널널한 아파트에는 친구와 나 둘 뿐이었다.

원고를 보고 난 뒤  모처럼 와인을 마시며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난 이튿날 아침이다.

우린 차를 몰고 근처 작은 산(이름을 모르겠다)으로 등산을 갔다.

친구는 배낭에 물병을 챙겼지만  나는 맨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원래 등산은 계획에도 없었던 터라 준비된 것도 없는 데다가,

그저 산보 정도로만 걷고 올 생각이었으니까.

 

친구는 속도가 느리고 난 다소 빨랐다.

걷다 보니  둘 사이가 자꾸 벌어지기 시작했다.

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친구와 보조를 맞추다가,

정상에서 기다리겠노라 했다.

친구 말로는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는데

1시간 반 정도 걸린다니  별 것 아닐 것 같았다. 

 

안내판을 살피며 나는 정상을 향해 걸었다.

한데 표지판 대로 가다보니 내리막만  길게 나온다.

방향을 바꿔 나는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람기라곤 없는 비온 뒤의 산은 몹시 습하고 후텁하여

몸에선 비오듯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체질은 유난히 물이 많은지, 움직였다 하면

남보다 땀을 몇 곱은 흘리는 편이라 더 많은 물을 요한다.

 

땀이 쏟아지자 이내 갈증이 느껴져  친구에게 핸펀을 쳤다.

산이라 그런가 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아예 먹통이 되곤 했다.

핸펀의 밧데리 눈금은 하나만 남아 있는데 대화가 안돼다 보니

마침내 애가 타기 시작했다.

정상에 가는 걸 포기하고 나는 정상으로 가고 있을 친구를 찾아 헤매었다.

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등산객들에게 길을 물어 보려 해도 출발 지점 위치를 모르니

소용이 없고, 아는 거라곤 친구의 아파트가

삼성 쉐르빌인지 래미안인지라는 것 밖에 동네 이름조차도 몰랐다.

일단 하산하기로 맘을 정하고 등산객에게 주차장을 물으니

어느 주차장이냐 되물어 오는데 난 할 말이 없었다.

묻기를 포기하고 혼자 길을 찾기로 했다. 

길 눈 어둔 내가 엉뚱한 곳으로 잘 못 들어선 모양인지

올라 올 때와는 영 딴판의 길만  자꾸 나왔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길이 복잡하게 뻗어 있어 한참 애를 먹었다.

몸에 지닌 거라곤  밧데리가 다 닳은  핸펀과 손수건 한 장.

  

한 시간도 더 넘게 이리 걷고 저리 뛰다가 어느 지점에서 친구를 만났다.

"작은 산이라고 웃읍게 보고 왔다가 목 말라 죽을 뻔했다" 고 하자,

신문에도 나왔다며 작년 겨울 이 산에서 사람 셋이 얼어죽었다고 한다.

이 작은(?) 산에서 얼어죽다니, 남들은 믿지 않을지 모르나 난 충분히 이해되었다. 

길 잃고, 날 어둡고 저체온증이 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몇번의 등산을 통해 나는 그런 걸 내 몸으로 경험했으니까.

 

작년 겨울이다.

영하 8도의 날씨에 서울산행 식구들과 도봉산에 갔다가

저체온증으로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 고생한 적이 있었다. 

한번 떨어진  체온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 한 자꾸 떨어졌고,

몸을 움직이면 언제 떨었더냐 싶게 금새 추위는 가시지만 이내  땀이 나는 탓인가

하산 후 움직임이 가벼워지자  온 몸이 도로 으슬으슬 떨려왔다.

뒷풀이 때 소주 한 잔에 뜨거운 찌개를 먹어도  몸은 녹지 않았고,

집에 와서까지도 이불 속에서 몸을  떨고 있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토마토처럼 상기되어 있는데, 춥다며 떨고 있는 나를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나와 조건이 비슷한 사람 외에는...

하지만 그 동안의 산행 중에 나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 큰 산이나 명산 만이 산은 아니다.

모든 산은 다 산이다.

달랑 작은 봉우리 하나만 있는 낮은 동산이 아니라면

산에 오를 땐 간소한대로 나름의 장비를 갖춰야 한다.

그건 산을 대하는 겸손의 태도이자  예의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 같이 별스럽고 힘이 모자란  인간은

더욱 더 그 예를 차려야 할 것 같다.  

       

'민혜의 골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어머니  (0) 2007.01.04
나무 지팡이  (0) 2007.01.04
그리운 것은 별처럼 멀다  (0) 2006.03.26
내 남자 친구의 전화  (0) 2005.12.05
다시 읽는 <세토우치 자쿠코>  (0) 2005.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