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랄 것 까지는 못 되는 글>
일터에 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들려오는 음성,
"저, 이 * *입니다."
어머나, 루쵸(그의 세례명이다), 내 띠동갑 노총각 친구 아닌가.
그간 아들 결혼을 앞두고 그에게 이멜로 청첩장을 보냈건만,
도무지 소식이 없고, 수신 확인을 해봐도 열어 본 흔적이 없기에
벼라별 상상을 다 했었다.
어디 아픈가?
글 쓴다고 은둔중인가?
여행을 갔나?
나를 가지치기 한 건가?
이멜 주소가 바뀌었나?
.................
그는 입이 하나인 게 답답하다는 듯
소식을 전하기에 바쁘다.
그동안 카자흐스탄에 가서 몇 달 있다 왔단다.
미처 연락을 못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전화를 해도 내가 받지 않더란 게다.
하긴 내가 그 동안 고달픈 삶을 사느라고 전화 안 받은 적이 많았지.
귀국후 집에 오니 컴이 고장나 피시방에 가서 이멜 보고
울 아들 결혼 소식을 접했단다.
그가 소뿔은 단김에 빼야하니 오늘 만나자는 것을,
겨우 내일 오전으로 약속을 잡아 놓았다.
그게 언제였더라,
지난 해 12월이었나, 올 1월이었나.
대구 생활을 접고 올라와 신촌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월남 쌀국수를 맛나게 먹고는, 연대 쪽의 어느 까페에 들어가
신나게 수다를 풀어 놓았다.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자주 만나뵙고 싶어요."
나도 화답했다.
"그래요, 우리 한 두달에 한번은 만나기로 해요."
그러고는 두 사람 모두 여지껏 꿩 궈먹은 소식이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 둘 사이의 간격이 일정 거리 이상 좁혀지지 않았고,
이성 관계이면서도 무성 관계 같은 느낌으로 지내왔다.
어딘가 <니콜라스 케이지>를 연상시키는 그는
내 쪽에서 먼저 찍어 알게된 소설가 문우이다.
십여년 전, 이호철 선생의 강의실에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독특한 그의 분위기에 홀려 그와 말을 해보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뭐랄까, 그에게선 몰락한 귀족( 그렇다, 양반이 아니다. 그에겐 백작이나 공작 같은
서구적 호칭이 더 어울린다)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우수, 품격, 젠틀, 지성....
나이는 어리지만, 왠지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내 예측은 빗나가지 않아, 그와 나는 한 동안 열나게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키워 나갔다. 나의 졸저 <장미와 미꾸라지>의 탄생은 순전히
그의 말 한마디 작용으로 이뤄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2살 연하라면 까마득한 후배인데도, 그는 퍽이나 위엄있게 내게 경고하였다.
책을 내라, 책을 내지 않으면 앞으로 만나지 않겠다.
그의 눈빛은 어느때보다도 준엄하게 번뜩였다.
그는 내게 늘 힘을 주는 문우이기도 하다.
내가 동화를 쓰고 싶다 했을 때, 그 친구처럼 기뻐해준 이는 없었다.
글이 안된다고 상심해 있을 때면 늘 나를 위로하고 고무하였다.
"나는 여지껏 안나만큼 예술적인 여성을 보지 못했어요."
때로 그는 이런 최상급 표현으로 나를 띄워주기도 한다.
집에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면 역시 최상급의 찬사로 보답을 하곤 했다.
그러니 그에게 내놓는 음식은 더욱더 고품격이 될 수 밖에.
나는 그가 왜 총각을 고수하는지 궁굼하지만 묻지 않고,
그는 여느 사람처럼 내 남편이나 가정사에 대해 궁굼해 하지 않는다.
만남은 잦지 않았지만, 헤어질 땐 늘 아쉬워 앞으론 자주 보자고 한다.
내일 그를 만난다니 흥분이 된다.
이번에도 내가 주로 떠들고 그는 듣기만 할까?
아니다, 카자흐스탄엔 왜 몇달 씩이나 머물렀는지 물어봐야지.
그가 전번처럼 검정 롱코트를 입고 나타났으면 좋겠다.
장신의 그는 롱코트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는 또 머리를 길게 길렀을까.
나도 굽 높은 구두 신고 모처럼 조금 멋을 내야지.
제주 독자에게 초대받아 가게 된 자랑도 늘어 놔야지.
그러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줄 친구다.
이런 친구가, 더구나 이성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살맛나는 일이다.
와우~~ 신나라!
빨리 와라,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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