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예산을 다녀 온 뒤로
루도비꼬 신부님으로부터 매일 메일이 한 통씩 들어온다.
언젠가 나는 플래닛에 <e 메일과 우체통 편지>라는 글을 적어 놓은 적이 있다.
신부님께 편지를 써놓고도 차일피일하다가 부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신부님이 인터넷을 하신다면 진즉에 이메일을 주고 받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아쉬움을 적은 글이었다.
이번에 내려가니 신부님은 장족의 발전을 하시어 이멜을 하실 수 있단다.
한데 문제는 문자 사용을 잘 못하신다는 것.
신부님은 중풍으로 언어장애가 온 것 뿐만 아니라,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고,
한글의 받침에 대한 개념도 없어졌단다.
유머감각이 여전한 신부님은
'단순무식'쟁이가 되었노라 하시며 웃는다.
신기한 건 글을 읽는 건 별 문제가 없으시다는 것.
내가 보기엔 사고의 기능도 괜찮으신 것 같았다.
내 이멜 주소를 알려달라 하시기에 메모해 놓고 왔더니,
그날로 즉시 메일을 보내오셨다.
제목은 <사랑하는 안나>.
제목을 읽는 순간 콧등이 시큰해온다.
지난 날 신부님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가.
남편과 아들은 그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다.
다른 신부님이었다면 까다롭기 그지없고 반골인 남편을
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한 시절, 울 남푠은 신부님께 대드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으니까)
아들의 교통 사고, 남편의 실직, 빚더미 살림...
우리 가정이 가장 암울하고 고통스럽던 시절
그 분은 우리 성당 주임신부님으로 오시어 가난한 우리 집을 자주 찾아주셨다.
다른 본당으로 떠나신 뒤에도 가끔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미국에서 사목 하실 땐, 한지에 붓으로 정성껏 쓴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신부님이 처음 보내온 이메일.
놀랍게도 (나도 잘 안쓰는)카드 메일을 사용하셨다.
게다가 그날 비가 왔다고, 카드도 비오는 그림을.
본문을 읽어내리니 문장이 단순(무식)하고, 툭툭 끊어지고,
받침도 엉망이라 마치 어린애가 써놓은 글 같다.
'행복세요'라는 문장도 있는데, 전후를 살피니
이건 '행복하세요'가 아니라 그날 찾아주어
'행복하였다'는 뜻이었다.
한데도 <사랑>이란 단어만은 정확히 쓰셨다.
매일 메일을 하다보면 신부님의 문자 감각이 살아날 수 있을까.
요 며칠 나의 수신메일 속엔 <사랑>이란 단어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애나,
사랑하는 애나,
제목에도 나오고 본문에도 나오니
나는 갑자기 <사랑의 숲>에 휩쌓인 것만 같다.
*
김정홍(루도비꼬)신부님은 발산동 본당 주임사제로 처음 본당을 맡으신 후,
답십리 성당, 홍제동 성당, 미국 교포 사목, 세종로 성당을 거치셨다.
세종로 본당 재임시 중풍으로 쓰러지시어, 현재는 예산에서 요양하시며
시골 신부님으로 살아가신다.
누구라도 품어 안는 넉넉하고 따듯한 인품,
털털한 듯 예리하며 감성적인 이면,
거기에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언제나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물론 신부님을 연모하여 줄줄 따르는 여신자들로 엄청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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