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한통이 배달 되었다.
겉봉에 쓴 글씨는 만년필 잉크 자국이 번져 있어,
뭔지 모를 훈훈함이 배어있는 듯 했다.
발신인은 전직 E여대 교수님이자 조각가요
피아니스트이자 수필가이신 Y 선생님이다.
그 분은 동인이면서 나와는 얼굴 한 번
마주친 적이 없는데도,
몇 차레 연하장을 보내주셨다.
손수 그리신 연하장을 받고도 나는 그만 답장을
놓친 적도 있었고, 고작 이멜 카드로 땜빵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는, 크레파슨지, 색연필인지로
그림을 그려 보내드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좀 주책기가 있는지, 못 그리는 그림으로
이따금 지인들께 그림 카드(연하장)를 보내곤 하였다.
그 대상은 주로, 마땅히 인사를 차려야 했으나
못 차린 분들에 한정되었다.
거기엔 내 정성과 아울러 카드를 사러가야 하는
번거로움이나 카드 값 절약이라는 삼중적 계산(?)이
깔려 있었는데, 다른 분들에겐 아무 부담없이 쓱쓱 그려
보내드렸으나. Y 교수님 경우는 하필 미술을 전공한 분인지라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일단 손을 놀리면 머뭇거림이 적은 편인데도
그 선생님께 보내는 것만은 두 장인가 파지를 내고,
세번째에 어린애 같은 유치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어제 Y 선생님은 편지 한 통과 곁들여
수필 한편을 보내오셨다.
좀 봐달라는 것이다.
한데, 나와는 비교도 안될 학식과 덕망과
예술 세계를 지닌 분이 너무도 겸허히 하시는 말씀에
나는 그만 뭉클해졌다.
<...이번 동인지에 나온 글도 맨 먼저 읽었습니다...>
<이 사람이 글을 보내는 작가는 두 세사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창작 예술은 결코 권위주의나 포퓰리즘에
현혹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미술 작품도
평론가에게 보다 제자에게 보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이 가을에 보내온 잉크빛 편지 한통을 받아들고,
모처럼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내 마음 한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상해! (0) | 2005.10.12 |
---|---|
캐나다의 S Park 에게 (0) | 2005.10.12 |
힘 좋은 땅 (0) | 2005.10.11 |
수녀님 마음/ 엄마 마음 (0) | 2005.10.11 |
[스크랩] 땡큐, 우장산 (0) | 200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