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스크랩] 땡큐, 우장산

tlsdkssk 2005. 10. 8. 07:07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서울내기인 나는 유년 시절을

충무로에서 보냈다. 

충무로는 중구에 속하니

서울 중의 서울에 살았던 셈이다.

 

그 때 바라본 퇴계로는(대한극장 주변),

엄청 넓기만 해서 길을 한 번 건너려면(포장도 안됐던 시절이니

신호등이 있을 리 없다) 

간이 조마조마 하기만 했다.

차량이라야 가믐에 콩나듯

드문드문 다닐 땐 데도  어린 마음엔 엄청난 광장을

긴 띠처럼 늘어 놓은 듯 막막하였다.

 

하지만 정작 더 두려운 건,

어쩜 나는 어른이 되어도 찻길을 혼자

건너지 못할 거라는 걱정때문이었다.

그 걱정은 가히 공포의 수준으로

나를 억눌렀다.

'길도 못 건너는 어른이 되면 챙피해서 어쩌지?'

어린 마음에 그 두려움은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퇴게로보다 좁은 찻길을

혼자 건너는 연습을 했다.

차들이 저만치 오면 나는 후다닥 길을 건너고,

휴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번 성공하자. 용기가 생겨

나는 두 번 세 번, 횟수를 늘려 나갔다.

속으로 뿌듯했다.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졌다.

나는 우쭐했다.

내가 건넌 길의 넓이를 합산하면 그깟 퇴게로 길쯤은

문제도 아니잖는가.

쳇, 별 거 아니군! 괜히 걱정했어.

 

그 며칠 후,

나는 드뎌 대한극장 앞길을 횡단할 맘을 먹고

혼자 집을 나섰다.

한데 이게 웬일? 그간 몇차레나 혼자 찻길을 건넜는데,

그 넓이를 다 더하면 이 정도 길쯤은 문제도 아닌데,

왜 이리 무섭고 다리가 후둘거린단 단 말인가.

결국 그날 나는 길을 건너지 못헀다.   

나는 절망했다.

어른이 되어도 결코 혼자 길을 못건널 거란 생각으로,

나는 미래를 싸잡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옛일을 떠올린 건,

우장산과 연관된 최근의 산행때문이다.

지난 초 여름, 나는 울 동네의 작은 동산

우장산 공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건강과 잡념을 잊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산꾼 녹산님의 조언으로 행동개시는 빨라졌다.

 

언제가 그분에게 물었다.

"우장산 열심히 오르면 다른 산도 오를 수 있나요?"

그분은 그렇다고 했으나,

녹산님의 산행 얘기를 들으면, 어릴 적 퇴계로의 절망이

그대로 되살아나며,

'나이도 먹어가니, 난 할 수 없을 거야.'하는

회의부터 들었다.

높이라야 92m도 채 되지 않는 우장산 오르기도 이리 힘든데

어찌 높은 산을 오르겠나.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던 지난 9월, 나는 그 분을 따라

처음으로 청계산에 올랐다.

완만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우장산과 달리,

그 등산로는 초장부터 경사가 심해 허벅지가 댕겨왔다. 

순간, 나는

'난 어른이 되어도 저 길을 혼자 못건널 거야' 하며

절망햇던 유년시절 내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등산은 못할거야. 벌써부터 이렇게 힘드니 어떻게 하겠어?

 우장산은 어린 시절 내가 건넜던 좁은 찻길과도 같아.....'

 

그런데, 해냈다.

산꾼에게 '기대 이상이다'라는 칭찬까지 들으면서....       

이 모든 게 다 우장산 덕이다.

고마운 우장산.

 

산다는 건 우리가 노력하고 희망하는 것만큼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는 것만큼 어둡게 풀려지는 것만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출처 : 땡큐, 우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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