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서울내기인 나는 유년 시절을 충무로에서 보냈다. 충무로는 중구에 속하니 서울 중의 서울에 살았던 셈이다.
그 때 바라본 퇴계로는(대한극장 주변), 엄청 넓기만 해서 길을 한 번 건너려면(포장도 안됐던 시절이니 신호등이 있을 리 없다) 간이 조마조마 하기만 했다. 차량이라야 가믐에 콩나듯 드문드문 다닐 땐 데도 어린 마음엔 엄청난 광장을 긴 띠처럼 늘어 놓은 듯 막막하였다.
하지만 정작 더 두려운 건, 어쩜 나는 어른이 되어도 찻길을 혼자 건너지 못할 거라는 걱정때문이었다. 그 걱정은 가히 공포의 수준으로 나를 억눌렀다. '길도 못 건너는 어른이 되면 챙피해서 어쩌지?' 어린 마음에 그 두려움은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퇴게로보다 좁은 찻길을 혼자 건너는 연습을 했다. 차들이 저만치 오면 나는 후다닥 길을 건너고, 휴유,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번 성공하자. 용기가 생겨 나는 두 번 세 번, 횟수를 늘려 나갔다. 속으로 뿌듯했다.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졌다. 나는 우쭐했다. 내가 건넌 길의 넓이를 합산하면 그깟 퇴게로 길쯤은 문제도 아니잖는가. 쳇, 별 거 아니군! 괜히 걱정했어.
그 며칠 후, 나는 드뎌 대한극장 앞길을 횡단할 맘을 먹고 혼자 집을 나섰다. 한데 이게 웬일? 그간 몇차레나 혼자 찻길을 건넜는데, 그 넓이를 다 더하면 이 정도 길쯤은 문제도 아닌데, 왜 이리 무섭고 다리가 후둘거린단 단 말인가. 결국 그날 나는 길을 건너지 못헀다. 나는 절망했다. 어른이 되어도 결코 혼자 길을 못건널 거란 생각으로, 나는 미래를 싸잡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옛일을 떠올린 건, 우장산과 연관된 최근의 산행때문이다. 지난 초 여름, 나는 울 동네의 작은 동산 우장산 공원을 오르기 시작했다. 건강과 잡념을 잊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산꾼 녹산님의 조언으로 행동개시는 빨라졌다.
언제가 그분에게 물었다. "우장산 열심히 오르면 다른 산도 오를 수 있나요?" 그분은 그렇다고 했으나, 녹산님의 산행 얘기를 들으면, 어릴 적 퇴계로의 절망이 그대로 되살아나며, '나이도 먹어가니, 난 할 수 없을 거야.'하는 회의부터 들었다. 높이라야 92m도 채 되지 않는 우장산 오르기도 이리 힘든데 어찌 높은 산을 오르겠나.
그렇게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던 지난 9월, 나는 그 분을 따라 처음으로 청계산에 올랐다. 완만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우장산과 달리, 그 등산로는 초장부터 경사가 심해 허벅지가 댕겨왔다. 순간, 나는 '난 어른이 되어도 저 길을 혼자 못건널 거야' 하며 절망햇던 유년시절 내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등산은 못할거야. 벌써부터 이렇게 힘드니 어떻게 하겠어? 우장산은 어린 시절 내가 건넜던 좁은 찻길과도 같아.....'
그런데, 해냈다. 산꾼에게 '기대 이상이다'라는 칭찬까지 들으면서.... 이 모든 게 다 우장산 덕이다. 고마운 우장산.
산다는 건 우리가 노력하고 희망하는 것만큼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망하는 것만큼 어둡게 풀려지는 것만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