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었다.
일터에서 나와 집을 향해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저기요, 저기요....."
돌아 보니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귀여운 남학생이다.
"날 불렀니?"
녀석은 끄더끄덕 하더니,
무슨 종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니?"
"조퇴 사유서인데요, 요기다가요, '복통'이라고 써주시겠어요?"
알고 보니 녀석이 전날인가 조퇴를 했는데,
사유서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왜 내가 쓴단 말인가.
"그건 니 어머니에게 써달래야지."
"엄마가 지방에 내려가셨거든요."
"그럼, 니가 적당히 필체를 바꿔 쓰렴. 어차피 네 부모님이 써주시는 게 아닌데..."
"제가 쓰면요, 선생님이 알아보신다구요."
"근데, 니가 복통이었는지 아닌지 내가 어찌 알고 써주겠니?"
녀석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는데다가,
한편으론 녀석이 귀여워 나는 슬슬 장난끼가 발동했다.
"저, 진짜 복통이었다구요."
녀석은 눈이 동그랗고, 얼굴은 우유빛이고,
뺨에는 수수알만한 여드름이 다닥다닥한 게,
여간 귀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 좋았어."
결국 나는 종이를 받아들고, 내 특유의 흘림체 글씨로
'복통'이라고 써주었다.
그제야 녀석은 씨익 웃으며
"고맙습니다." 한다.
어쩌면 나는 녀석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
녀석은 복통 아닌 다른 일로 조퇴를 하고,
다급한 마음에 나를 불러댔을 수도 있다.
수필 동인 한 분은, 학생시절 사고를 치고
선생님이 부모 모셔오라는 바람에,
이웃집 가게 아저씨를 꼬셔서 대리부모
행세를 하겠끔 했다지 않는가.
학창 시절 '범생이'가 아니었던 나는
'날라리'들의 맘을 조금은 헤아릴 줄 안다.
그 시절의 호기심이나 장난끼나 모험심 같은 건
어느 정도 문제성과 위험성도 안고 있지만,
인간의 폭을 넓혀주는 데도 한 몫 한다고
나는 믿고 있으니까.
세상엔 반듯하고 잘 닦인 고속도로만 있는 게 아닌데,
한 가지 길만 고집할 필요가 무어랴.
이름 모를 소년아,
내 마음은 아직도 80%는 네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단다.
한데 왜 하필 나를 찍었니?
내가 첫번째였을까?
아님 두세번째였을까?
그날, 내가 네게 넘어(?) 간 것은
네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네 귀여운 얼굴 때문이었단다.
너 같은 넘은 설령 무슨 짓을 해도,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것 같았거든.
ㅎㅎㅎ 그러구 보면,
미인계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가 보구나.
'내 마음 한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가의 토토 (0) | 2005.10.02 |
---|---|
섣불리 위로하려 들지마라 (0) | 2005.09.29 |
맛있을 때 많이 먹어 (0) | 2005.09.28 |
보내지 못할 편지(모연 샘님께) (0) | 2005.09.26 |
멍 (0) | 2005.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