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물녘,
창너머 저 멀리 보이는 다닥다닥한 주택들이
흡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Boca) 지역을 연상케 한다.
보카라니. 내 언제 그 먼나라 아르헨티나를 가봤으랴만
오늘 따라 맑은 하늘과 석양 받아 붉으스레 물든
층층의 인가들이, 언젠가 사진에서 본 보카의
다닥다닥 붙은 원색 건물과
푸른 하늘을 상기시킨 것 뿐이다.
마침 내 골방 가득 탱고(여인의 향기)가 울리고 있으니.....
사흘째 줄곧 음악 속에 묻혀 산다.
아침엔 주로 클래식을 들었으나,
웬일로 예전만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작곡 하기도 힘들었고, 연주도 힘든 그 많은 고전들은
듣기에도 역시 부담스러운 데가 있다.
젊은 시절엔 밤을 지새우며 듣던 곡들이건만,
요즘은 나를 짙누르는 소리처럼 들려 오니 별일이다.
10여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며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는데,
갑자기 알수 없는 짜증이 치미는 거였다.
"베토벤 땜에 소화가 다 안되겠네."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음악을 꺼버렸고,
그 후론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가볍고 경쾌한
댄스 뮤직이 좋아졌다.
전같으면 귀가 찢어진다고
눈쌀을 찌푸렸을 음악들이
요즘은 당긴다.
세월따라 변하는 게 식성만이 아닌가보다.
오후엔 1시간이나 계속하여 탱고 뮤직을 들었다.
한 동안 탱고가 듣고 싶어 교보의 음반 코너를
기웃거린 적이 있었으나, 마땅한 것을 구하지 못해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최근 인터넷 까페에서
탱고 음악을 발견하고는
열심히 내 플래닛에 퍼 날랐다.
주름치마 잡아 늘리듯 리드미칼하게 늘어지다가,
어느 순간 스타카토로 탁탁 꺾어주는 탱고 뮤직은
들을수록 빨려드는 구석이 있다.
탱고란 본디 사회에서 버림받은 하층민들이
추던 사교춤이라는데, 탱고엔 멜랑콜리가
물씬 풍겨나면서도 그 애환을 탁탁 털어버리는 듯한
반전이 순간순간 깃들여 있다.
그 '치명적 유혹'(이 표현이 기막히게 들어맞는다)에
현혹이 되는 걸까.
탱고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으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는게
한바탕 진한 춤이라도 추고 싶다.
나같은 '몸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기교적인 탱고를
출 수 없을 것이나, 상상속에서만큼은 전신이
땀으로 젖을 만큼 격렬하게 탱고를 춘다.
이 저녁, 나는 홀로 <보카>를 헤매며
탱고를 추는 무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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