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고 나면 마지막 과정에서 퇴고라는 걸 하게 된다.
경험에 의하면, 퇴고란 즉시 하는 것보다
한참 시간을 두었다 하는 게 효과적인 것 같았다.
간밤에 잠을 못 이루어 친구에게 메일을 쓰다가,
그 내용에 해당하는 자작 수필 한 편을 골라
첨부 파일로 보내주었다.
03년 9월에 써 놓고는 한참 동안 묶혀둔 글이었는데,
보내고 나서 읽어 보니 여기저기 헛점이 보인다.
당시에 몇 번인가 고쳤을 것이 분명한 데도
지금 보니 빼고 고쳐야 할 곳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였다.
그 덕에 글을 다시 손 본았다.
글을 고치다 보니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만약 이담에 이승의 생을 다하고
저 높으신 분(염라대왕이든 하느님이든)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면,
고치고 싶은 장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인쇄소에서 인쇄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니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게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행위에 대해
나름의 반성을 할 줄로 안다.
나 또한 간간히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편이다..
그러나 퇴고란 게 한참을 묶혀두어야 밝은 눈이 떠지듯
삶을 반추하는 것 또한 긴 시간과 성찰을 요한다.
인격의 성장과 아울러 삶과 인간을 재해석하는 혜안도 필요하다.
삶이 각자가 쓴 작품이라면, 죽음이란 전 생애를
출판사로 옮겨 한권의 책으로 내놓는 일인것 같다.
그러니 각자의 작품이 걸작이 되고 졸작이 되는 건,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자기 퇴고를 얼마나 진지하고
밝은 눈으로 했는가에 달려 있을 게다.
퇴고가 덜 된 작품이 책으로 나왔을 때,
나는 얼마나 부끄럽고 후회가 되었던가.
제 감정에 취해 쓴 글은 대체로 경박하고 유치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것도 나중에 보면 부끄럽기만 한 적이 많았다.
어찌 보면 삶이란 부끄러움을 쌓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불면의 밤을 보낸 나는 이 아침에
삶의 퇴고를 신중히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자비하신 하느님,
어느 훗날 저를 불러들이실 때
제게 퇴고할 시간을 허락해 주세요.
마음의 핏발을 세우며 저를 돌아볼 수 있도록,
칼날같이 예리한 눈으로
저를 살펴 볼 수 있도록,
숱한 잘못을 만회할 수는 없을 망정
그 잘못들을 통절히 깨닫고는 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음 생(저는 윤회를 믿습니다)이 펼쳐질 때는
좀 더 나은 생을 살 수 있도록
제 눈을 밝게 밝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