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셜리 발렌타인

tlsdkssk 2005. 8. 8. 21:13

 

"왜 삶을 받았지? 사용하지도 않을 거면서...

내 안엔 그렇게 많은게 들어 있는데

난 이렇게 작은 삶을 살았어..."

 

지난 여름, 나는 그 말 마디를 듣기 위해

같은 연극을 두번이나 보았다.

 '셜리 발렌타인'

 

연극의 첫 장면은 셜리의 주방이다.

그녀는 남편의 저녁 준비를 하면서 벽에게 중얼거린다.

"난 요릴 하면서 와인 한잔 하는게 좋아. 알지, 벽아?" 

 

벽에게 얘기를 하는 셜리 발렌타인.

하기야 나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내 경우엔  벽 대신 집 전체를 향해 말하곤 했다.

우리 가족(특히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알고 있을  우리의 작은 집에게.

 

베로~와 그 연극을 처음 볼 때,

나는 위에 말한 그 대사를 들으며 콧마루가 아려왔다. 

셜리 역을 맡은 손숙도 그 대사를 읊으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두번째 그 연극을 볼 때도 나는 그 대목에서

똑같이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누가 볼세라 손수건으로 눈치껏 눈가를 훔쳤다.

빤히 다 아는 줄거리요 대사임에도 목이 메어왔다. 

셜리 역을 맡은 손숙 역시 먼저와 같이

물기 젖은 눈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두번째는 먼저보다 더 목멘 연기를 하고 있었다.

 

셜리는 말한다.

"내 인생 자체가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어.

충분히 살지 않았거든...."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감정과 꿈과 희망을 지닌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셜리는 신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한다.

충분히 산다는 것,

충분히 산다는 것,

그래, 그것이 문제다.  

우리를 죽이는 건,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낭비된 삶의 그 끔찍한 무게이다.

 

연극 <셜리 발렌타인>은

여성의 자아찾기를 다루면서도

무겁거나 전투적으로 목청을 돋구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 그 연극의 매력과 세련됨이 있다.

주인공의 일상을 통해 자아찾기를 보여주면서도,

패미니즘적 메세지를 무리하게 쑤셔 넣는

촌스러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종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유머러스한 대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웃으며 '패미니즘'이란 알약을

즐거이 먹게 해준다. 

1인극이면서도 극중 인물 15인의 역할을 재현해 내는

배우의 탁월한 능력으로 연극은 끝날 때까지

관객을 휘어 잡는다.

 

"빌어먹을, 난 벌써 마흔 둘이야" 하는 대신에,

"셜리, 넌 마흔 둘밖에 되지 않았어. 정말 신나지 않아?"

라고 묻는 셜리에게 빼져들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지구를 떠나도 좋으리라.

 

요리 투정을 하며 상을 엎고,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로 아내에 대한 무례를

다 뭉개버리려는 남편과,

엄마의 존재를 여성이 아닌

'엄마 자동 기계' 쯤으로 이해하는 자식 틈에서

셜리는 결혼을 '중동 문제'같은 거라고 규정한다.

해결책은 없다고,

여기저기 잡아당겨 보다가 이 부분은 양보하고,

저 부분은 관철하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고.

 

나는 극본을 쓴 작가가 당연히 여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만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작가는 1947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윌리 러셀>이란 남성이다.

남성이  중년 여성의 델리킷트한 심리를 어찌 그리

잘 묘파해 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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