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1515-1582)는 ‘영혼의 성’에서
인간 내면의 신비스런 세계를 한 채의 성(城)에 비유해 설명한다.
그 성안에는 7개의 방(궁방)이 있고,
각 궁방으로 옮겨감에 따라 영혼의 상태가
변화되고 진보한다고 한다.
‘궁방’(안식처, Morada)이 라는 것은
하나님과인간이 주인공이 되어 만드는
생생한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써,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기까지의 점진적인 과정(단계)들을 일걷는다.
제1궁방
첫 궁방에 들어가는 관문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성찰’이다.
이 단계의 영혼은 은총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 세속적인 것에 크게 집착하기 때문에
기도 중에도 갖가지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한 고요를 확보하지
못하기에 묵상기도를 하기 어렵다.
이런 자들은 묵상보다는 소리나는 기도를
하면서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속으로부터의 이탈과 내면으로의
집중을 위하여 세속적인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비록 세속에 빠져 있기는 할망정
조심씩이나마 주께 기도하기도 하고
오랫동안은 아닐지라도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한 달에 기껏해야 몇 번 안되는 기도를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6:21)는
말씀과 같이 세속의 애착이 깊은 까닭에
잡다한 생각 속에서 기도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속에서 벗어나려고 다짐하는 때도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없으면
결코 자아 인식에 도달 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맑으심을 보면서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겸손을 배우고자 할 때 자신이 얼마나
그 겸손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악마는 항상 나쁜 뜻을 품고 있어 방마다
득실거려서 영혼들이 다른 궁방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한다.
가엾은 영혼은 그런 줄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별의 별 환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첫 궁방 사람들은 세속에 찌르고 쾌락에 빠지고,
명예와 야욕에 들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주신
능력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싶지 않고,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쉽사리 정복당하게 된다.
이 첫 궁방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마귀의 세력에서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으므로 자주자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러기에 둘째 궁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사소한 일들,
꼭 필요치 않은 일들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
제2궁방
이제 새로운 궁방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옛 버릇과 세속적 관심과 태도에 익숙해져
고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은
계속 타올라 모든 죄악을 극복하고 정화하고자 하는
내면의 치열한 투쟁을 겪게 된다.
이 때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악마는 여기서 꽃뱀같은 세상의 재미를 영혼 앞에 그려 보이고,
마치 부귀영화가 영원한 것처럼 꾸며 보이고,
세속에서 떠받드는 존경과 아울러 친구들과
부모 친척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악마는 무수한 장애물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진정한 만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이를테면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갑자기 죽어간 모습,
죽은 그들은 어느덧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호강하며 지내던 친지들이 땅속에 묻히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무덤을 밟고 지나 다니는 모습,
그리고 그 주검 위에 들끊는 구더기 등을 통하여
이생의 덧없음을 깨우친다.
그러나 자아는 신앙이 가르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궁방 안에 있는 영혼은 허영에 들떠 세속적이다.
그리하여 영혼은 엄청난 시련과 고생을 치러야 한다.
악마는 열심을 내어 덕성을 쌓으려고 하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온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애착과 열망을 깨뜨려 가야하며
오직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무수한 장애물과 불완전 속에 놓여 있고,
덕이라야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것뿐이다.
기도에서 맛을 찾을 때가 아니고 감각이 죽어야 할 때이다.
주님은 때때로 영혼에게 메마름을 주셔서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신다.
죄의 독성이 영혼 깊숙이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은혜없이 도저히 살 수 조차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육신의 연약함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영혼들에게 테레사는 다음과 같은 묵상기도를 권한다.
“아, 내 주님! 여기서야말로 당신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도움심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사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마귀의 궤계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시작한 바를 그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 빛을 내리시어 모든 행복이
여기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언짢은
것들과 사귀지 말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을 보고만 있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거들랑 부활하신 주님을 우러러보십시오.
고생스럽고 슬프거든 겟세마네 동산의 길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우러러보노라면 여러분은 마음이 감동될 것입니다.
그분과 말하고 싶어지기까지 할 것입니다.
님이여, 내 행복이시여, 이 몸이 당신 곁에
있는 것을 대견히 여기심을 나는 당신의
그 얼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나도 가리이다.”
항상 주의할 것은 영혼이 정복당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세속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망정 다시는
첫 궁방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이면
마귀는 그런 사람한테서 애당초 손을 뗀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모든 유혹은 자신의
연약함에서 오는 것들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제3궁방
테레사는 제2궁방에서 제3궁방에 들어간 자들에게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한 이여!”라고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뒤돌아서지 않는 한
구원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던
성인들도 큰죄에 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일에만 골몰하고,
끊이미없이 기도에 열중하고,
세상 것이 다 싫어진 듯 보인다해서 안심해서는 안된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애써 하나님을 거스르려 아니하고,
작은 죄마저 피하며, 즐겨 고행하는가 하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남을 사랑하는 일에 열중한다.
그들은 말하는 것, 옷입는 것에 빈틈이 없고
가정을 가졌으면 집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녹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은 죄악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빛이 스며들고 부자 청년이 구했던 것처럼
보다 완전함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을 충분하게 맞이할
내적인 준비가 부족하기에 영적인 메마름과
영적인 권태기를 느끼게 된다.
이 권태기의 원인은 겸손! 겸손의 부족에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뽑으신 사람들이 스스로의
비참함을 느끼도록 종종 당신의 도우심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러자마자 우리는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이러한 시험으로 자기의 결함을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슬퍼하게 되는 원인이 별 수 없이 세상 것,
대단치도 않는 것에 마음이 슬퍼지는
자기를 보고 더욱 쓰라리게 됩니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봅니다.
물론 결점임에는 틀림없지만 겸손을 위해선 얻는바가 큰 것입니다.”
특히 영적인 교만, 남에게 거룩하다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자신은 몇 발자국밖에 나아가지 못한 듯이 믿고
다른 자매들은 나보다 훨씬 진보했다고 여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평생동안 헤아릴 수 없는
고생과 비참 속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니 사는 것이 괴롭고
따분하고 비참의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다른 궁방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런 짐들은 거뜬하게 벗어버려야만 한다.
무엇보다 남의 잘못 보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잘못을 똑똑히 보기에 힘쓸 때
남을 가르치려는 어리석은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4궁방
이성의 작용에 의지해 오던 묵상기도는
점차로 단순히 사랑에 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기도로 넘어간다.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혼의 초월적 기쁨과
쉼이 일어나지만 아직도 여전히 불완전한 관상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거둠의 기도’와 ‘고요의 기도’가 필요하다.
거둠의 기도는 목자의 휘파람 소리로 비유된다.
궁안에서 계시는 임금님이 마치 어지신 목자처럼
휘파람을 부시는 데 이 목자의 휘파람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빠져있던
바깥 사물을 깨끗이 정리하고 마침내 성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무서움에도 그다지 마음이 조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은 전보다 더 무서운
느낌이 들지만 여기서는 노예적 공포심은 가셔진다.
하나님을 누릴 그때를 기다리며 든든히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전 같으면 건강을 해칠까 꺼려지던 고행도
하나님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생각한다.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용기를 내어 지독한
고행이라도 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믿음이 한껏 싱싱해져서 하나님을 위한 고생이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끈질기게 견디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고생을 애타게 바라기까지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리라는 의지가 굳세어진 까닭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깊이 알아갈수록
자신의 비참을 더욱 느끼게 되고,
이미 하나님의 맛을 느껴봤기에
온 세상이 초개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세상 것을 멀리하면서
자기를 지배하는 힘도 더욱 커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를 피하는데 온 정신을 써야 한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보기만 해도
별다른 이유 없이 이들을 거꾸러뜨리려고 발광한다.
이때 자기 도취에 빠져 황홀상태같이 여겨져
바보 놀음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인간의 교만과 허영에서 오는 것들임으로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이때 무엇을 열심히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영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제5궁방
여기서의 체험은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나을 성싶다.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요,
머리로 깨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덧없는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는
이를 설명하기에 너무 부족하다.
4궁방에는 독한 짐승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도
조그마한 도마뱀들은 날쌔기 때문에 어디고 스며든다.
말하자면 상상력이나 군생각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에 때로는 방해가 된다.
그러나 제5궁방에는 제 아무리 날쌘 도마뱀이라도 들어오지 못한다.
상상, 기억, 오관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막지 못한다.
여기에서의 행복은 이생의 모든 기쁨, 즐거움,
만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희열은 지상의 그것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살갗으로 느끼고 뼛속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밖에는
그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이 상태에 도달한 영혼은 엄청난 내적인 변화와 평화를 경험한다.
도대체 무슨 공로가 있기에 이런 행복을 맛보게 되며,
그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말하자면 자리로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전혀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그저 주님을 찬미하고 싶어서 못견뎌하며,
주님을 위한다면 무슨 고생이라도 달게 받고 싶고,
천만번이라도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
동시에 고행과 고독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았으면 하는 열망에
불타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거스르게 되면 못 견디게 슬퍼지는 것이다.
혈육이나 친구, 재산에 대한 애착 등이 전 같으면
아무리 애를 쓰고 결심하고 멀리하고 끊어버리려고 해도
끊어버릴 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거뜬히 끊어버릴 수 있다.
비록 고생을 당한다 하여도 고생 자체가 매우 값지고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에
고생 속에서도 평화와 만족이 샘솟듯 솟아난다.
다만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너무 모르거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던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패망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처럼 아파하고 슬퍼한다.
테레사는 이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누에의 비유를 들고 있다.
누에가 자라다가 몸이 굵어지면 고치를 만들어 자기 몸을 숨긴다.
누에는 그 안에서 죽어 어느덧 하얗고 어여쁜 나비가 되어 나온다.
자란 누에가 죽을 집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죽어
그리스도안에 우리의 생명을 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무한 속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영혼이 상태에 이르면 세속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 없어지고
누에로 변화되는 것처럼 완전한 탈바꿈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 이후 곧 바로 나방이 된 영혼은
엄청난 고독과 열망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나방은 무슨 일이라도,
고행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의 합일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날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만,
나방으로서는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신비적인 합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과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제6궁방
영혼이 더욱 더 하나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게 되고,
영성약혼이 이루어진다.
테레사는 먼저 영혼이 겪어야 할 3가지 시련을 소개한다.
첫째, 감각의 정화를 위하여 외적인 시련을 만나게 된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부끄러운 공격이 계속되고
그러한 시련으로부터 본성적 변덕스러움을 경험한다.
몸뚱이가 가루가 될지언정 단 한 번의 작은 죄라도
짓지 않으리라는 결단임에도 가장 아픈 일은
무의식중에 많은 범죄를 면할 수 없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의 칭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면,
갖은 모욕가운데서도 자유 함을 얻을 수 잇다.
두 번째는 실제적으로 중병에 걸리기도 한다.
이러한 육체적 고통은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맛보고
닮아 가는 과정이다.
세 번째의 시련은 영혼의 메마름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부재, 그러나 이성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을 느끼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짐을 당하는 듯한 느낌을 들도록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광대하심이 더욱 깊이 깨쳐지고
그분에 대한 사랑이 더욱 타오르고 있지만
그분에게 다다를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고통을 겪게 된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피조물의 무가치함 사이의
거대한 질적인 차이를 느끼면서
하나님을 열망하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고독이요 고통이 된다.
하나님은 이 단계에서 어떠한 일,
아무리 작은 일로도 당신의 뜻을
거스리지 않으리라는 철석같은 마음을 주신다.
그리하여 오직 이 마음 하나 때문에 속세가 싫어지고,
모든 명예와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속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자,
단 한사람이라도 도와주어서 그가 하나님을 한결
찬미할 수 있다면’
따라서 소리 크게 질러 만군의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외칠 수 있는 자유스런 열망이 불타기도 한다.
어떠한 고생을 치르더라도 이것만이 그의 소원일 뿐,
자기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좀더 찬미할 수 있다면
목숨이 백천이라도 몽땅 다 바칠,
바치고도 잃은 목숨을 보람있게 썼다 할 것이다.
“하찮은 고생 하나인들,
당신을 위하여 견딜 자격 없음을 완전히 깨칠
그 사람이옵거늘 하물며 죽음을 아까워하오리까?”
이 단계에서 이전에 경험했던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그리스도가 자기 옆에 가까이 계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보이는 듯한 착각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직관적인 인식이며 동시에 훨씬 맑고 선명하게
그분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는 현상이다.
영적인 능력이 탁월하게 강화되고 확장되어서
순수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도록 준비시키는 단계이다.
제7궁방
영혼의 가장 중심부인 이곳에서 영적 결혼이 이루어진다.
영혼은 완전히 하나님과의 합일되어,
일체의 욕망은 이미 정복되어 성 둘레와
궁방들에 있는 독스러운 것들이 전혀 해악을 주지 못한다.
이 궁방에서는 다른 궁방들에서 이따금 있던 마음의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고, 영혼은 거의 항상 고요 잔잔하다.
이는 소음하나 없이 지어진 솔로몬 성전과 같다.
제6방의 약혼 상태와 제7궁방의 결혼의 합일 상태를
두 촛불과 강에 내리는 빗물의 비유를 들어 표현한다.
영적 약혼이란 두 촛불이 순간적으로 하나의 불로 합쳐질 수 있는
상태인데, 그 둘을 떼어놓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결혼이나 강물 위에 떨어진 빗물과 같아서
결코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 제6방에서 자기애를 벗어버리고
자기가 죽는 수동적인 정화과정을 거치면서 받은 은총을 통하여
이제 영혼은 스스로 애쓰지 않아도
피조물의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영혼의 능력이 고양되고 확장되어서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합일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주님이 하신 그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가며
겸손의 덕을 쌓아가는 데에 있다.
특징은 ‘나의 잊음’이다.
이 잊음이 얼마나 오롯한지
‘나’는 이미 없고 것 같고
아무데도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털끌만한 영광과 찬미를 하나님께 보태어드릴 수 있는
자기를 발견하면 그때는 이를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내던 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해 당할 때 몹시도 마음이 기뻐지고
위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한 평화를 간직하게 된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생각하기는커녕
도리어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준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생이라도 하는 것을 보면 차마 못 견디고,
그 고생을 면해주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혹시 자기가 하나님께 받는 어떤 은혜를 그들이 받아서
우리 주님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면 그 은혜마저 즐겁게 사양할 것이다.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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