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칠죄종, 교만

tlsdkssk 2019. 11. 29. 08:35


가톨릭 교회의 칠죄종[편집]

현대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칠죄종」에 대해서, 요하네스 캇시아누스교황 그레고리오 1세 이래 전통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간주해져 온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이하의 일곱 개다[3].

(일곱 개의 게재순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라틴어 규범판[4]과 한국어판(2011년)으로 일부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한국어판에 쓰여져 있는 차례[3]에 의한다.

공식 번역명은 천주교용어자료집에서 따온다.[5]

한국어라틴어영어[6]
교만 superbia pride
탐욕 avaritia greed
질투 invidia envy
분노 ira wrath
색욕 luxuria lust
식탐 gula gluttony
나태 pigritia seu acedia(중세에는 acedia) sloth or acedia

머릿글자를 모아 SALIGIA로 줄여 사용하기도 한다.

중세의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이 가장 잘 나타내지고 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서사시, 「신곡」연옥편에서도, 연옥산의 일곱 개의 관에서 사망자가 이 죄를 맑게 하게 되어 있다(연옥편을 참조).

악마와의 연계[편집]

1589년, 독일의 페터 빈스페르트(Peter Binsfeld)는 죄와 악마의 관계를 적은 저작을 저술했지만, 그 중으로, 칠죄종도 특정의 악마와 관련짓고 있다. 이러한 일곱 개의 대죄와 악마와의 관련은 크리스트교의 본질적인 부분과 무관계하지만, 통속적인 그리모워르에서 인용되게 되었다.

칠죄종과 악마의 관련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16세기의 판화가 한스 부루크마이어이다. 이에는 악마가 각각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리본을 손에 넣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또, 중세에는 악마가 아니고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칠죄종과 그에 비견하는 악마와 동물
대죄 대응악마 동물
교만 루치펠 그리폰, , 공작, 사자
인색 맘몬 여우, 고슴도치
시기 레비아탄 ,
분노 아몬 , 드래곤, 늑대
음욕 아스모데오 전갈, 염소
탐욕 베엘제붑 돼지, 파리
나태 벨페고르 달팽이, 당나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peccatum proprium)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죄. 즉 교오(驕傲, 교만하고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김), 간린(慳吝, 하는 짓이 소심하고 인색함), 미색(迷色, 성욕의 노예가 되어 사물을 올바르게 보지 못함), 분노(忿怒 · 憤怒, 분에 겨워 몹시 화를 냄), 탐도(貪饕, 음식이나 재물을 탐하여 지나칠 정도로 먹고 마심), 질투(嫉妬, 우월한 사람을 시기함), 나태(懶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함) 등이 칠죄종이며, 이것들을 사람이 죄를 짓게 하는 원천으로 보며, 그래서 죄원(罪源)이라고도 한다. (⇒) 죄

 
칠죄종 (七罪宗)과 칠극 (七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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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칠죄종’이라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66 참조).
 
즉, 다음의 일곱 가지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죄의 원천, 죄의 근원으로서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다른 죄와 악습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1) 교만: 교만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여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행위 혹은 태도로서 모든 죄의 근본이 됩니다. 이 교만은 우리를 자만, 야심, 허영, 이유 없는 고집, 말다툼 등으로 기울게 합니다.
 
2) 인색: 인색은 세상물질에 대해 지나치게 애착하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부정축재, 사기 등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3) 음욕: 음욕은 성적 쾌락을 무질서하게 추구하고 즐기는 것으로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더럽힙니다.
 
4) 분노: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욕망으로서 불평불만, 모욕, 악담, 욕설, 폭행, 싸움 등을 초래합니다.
 
5) 탐욕: 탐욕은 음식을 과도하게 탐하는 것으로 정신력의 약화, 게으름, 건강 상실 등을 초래합니다.
 
6) 질투: 질투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으로 비방, 무고, 증오 등을 초래합니다.
 
7) 나태: 나태는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싫어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으로 무기력, 시간 낭비, 선행의 기피, 정신 산만 등을 초래합니다.
 
이와 같은 칠죄종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로서 일종의 ‘악한 습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태생적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누구나 조심하지 않으면 죄에 떨어지고, 그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이 칠죄종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매일의 양심성찰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살펴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이 칠죄종에 대응할 수 있는 덕행을 적극적으로 쌓아야 합니다.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였던 디에고 판토하(D. Pantoja)가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쓴 ‘칠극대전’이라는 책에서는 죄악의 뿌리가 되는
이 칠죄종을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1) 겸허한 마음으로 오만함을 극복함
2) 사랑으로 시기와 질투를 극복함
3) 인내심으로 분노를 극복함
4) 정결함으로 음욕을 극복함
5) 자선으로 인색함을 극복함
6) 절제 생활로 탐욕을 극복함
7) 부지런함으로 게으름을 극복함이 그것입니다.
 
“덕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몸에 밴 확고한 마음가짐”(가톨릭 교회교리서 180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지속적인 반복 훈련을 통해 익힌 좋은 습관인 것입니다. 덕을 갖추기까지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일단 몸에 익힌 좋은 습관은 악습이 우리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칠죄종을 물리치게 되는 법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덕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면 칠죄종을 극복할 수 있는 덕행들은 결국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 22-23)
 
                                  
 김흥주 베드로 신부 ( 인천가톨릭대학교 )


박한선의 '세븐' (연재중, 계속 갱신)
박한선

성 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성 안드레아병원 영성과 사회정신연구소 연구소장

성 안드레아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1.탐식(G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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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매달 둘째 화요일  "박한선의 '세븐'"은 칠죄종을 중심으로 정신의학적, 혹은 뇌과학적인 입장에서 시사적 이슈를  살펴봅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성 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박한선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1941년, 나치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수용지역, 즉 게토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에 따라서, 44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에게 하루 800칼로리의 열량과 3그램의 지방, 30그램 미만의 식물성 단백질만 제공했다. 많은 사람이 심각한 허기와 영양실조로 쓰러져 갔다. 그런데 게토에 살던 28명의 유대인 의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기아, 즉 굶주림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로 뜻을 모았다. 물론 연구에 참여한 의사, 그들 자신의 정신과 신체가 가장 면밀하게 조사되었을 것이다. 

“.... 그들은 감정이 밋밋해지고, 무기력해져서 어떤 의욕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허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빵이나 고기를 보면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여 맹렬하게 탈취한다.... 맥박과 호흡이 느려지고 환자가 제 정신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다가 결국 숨을 멎는다. 침대와 길거리에서 잠들면, 죽은 채로 아침을 맞는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느라 몸을 애써 움직이는 동안 죽어 간다. 때로는 손에 빵을 쥐고서 죽는다.” - ‘기아병: 바르샤바 게토에 있는 유대인 내과 의사의 연구, 1979’

결국 20달 만에 4만 명이 죽었다. 연구에 참여한 의사도, 절반 이상이 굶어 죽었다.(겨우 살아난 사람도, 나중에 25만 명 이상이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타의에 의해, 탐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여러모로 건강한 삶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먹어야 한다. 공기와 물 외에도, 40가지 이상의 영양소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기원후 4세기경, 칠죄종(七罪宗, 다른 죄와 악습을 유발하는 일곱 가지 핵심 죄.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을 처음으로 제시한 수도사, 에바그리오 폰시코는 가장 심각하고 저급한 죄의 유혹이 바로 ‘탐식’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사실 8개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는 탐식이 비록 가장 낮은 수준의 육체적 유혹이지만, 또한 가장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만이나 시기와 같은 유혹들은, 대개 없으면 없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러나 식욕은 너무 덜해도, 또 너무 더해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일은 아주 어렵다.

  
▲ '탐식', 게오르크 에마누엘 오피츠.(1804)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탐식의 죄를 급하게 먹는 죄, 게걸스럽게 먹는 죄, 지나치게 먹는 죄, 까다롭게 먹는 죄, 사치스럽게 먹는 죄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는데, 아마 뒤의 세가지는 당시 대다수의 평민들에게 피부에 별로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긴 인류의 역사 동안, 음식에 까탈을 부리거나, 좋은 음식을 과하게 먹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과거에는 기아가 닥치면, 왕이라도 굶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그레고리오가 언급한 탐식의 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정신의학의 영역에서 식욕이 지나치게 부족하거나 혹은 과다한 상태, 즉 신경성 식욕부진증이나 폭식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겨우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 빅토리아 시절 유럽의 귀족층에서 조금씩 보고되다가, 수십 년 전부터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에서는 약 5-10퍼센트의 젊은 여성이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으나,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이마 부분에 있는 안와전두엽[OFC]은 만족감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만족을 주는 대상을 잘 구분하지는 못한다. 고대하던 일을 성취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느끼는 현상이 바로 이런 기전으로 인해 나타난다. 반대로 상실감 혹은 좌절감, 공허함 등을 느낄 때, 이러한 불만족스러움을 다른 종류의 쾌락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자신의 뇌를 속여서, 스트레스를 달래고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다. 주변에 온통 맛있는 것이 가득하니,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음식에 손이 갈 수 밖에 없다.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먹방, 쿡방 열풍이다. 가히 음식 포르노의 시대다.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게 되면, 다들 경쟁적으로 SNS에 올리기 바쁘다. 유명한 ‘셰프’의 음식을 맛볼 수만 있다면, 긴 줄 서기도, 값비싼 청구서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낮에는 미식가처럼 까다롭고, 사치스럽게 음식을 가려 먹던 이들이, 밤이 되면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치킨과 피자를 목구멍에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일부는 폭식 뒤에 밀려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음식을 게워 낸다.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로 식사를 거부하는 이른바 ‘거식증’이 찾아온다. 체중을 줄이기 위해, 이뇨제와 하제를 남용한다. 독한 다이어트 약뿐만 아니라, 위험한 수술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종종 기아 상태로 병원에 실려 온다. 이런 엉망진창이 또 있을까? 이쯤 되면 정신과 의사를 찾게 되지만, 상당수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수도자 요한 카시아노는 인간의 타락이 육체적인 욕망, 특히 탐식에서 시작한다고 여겼다. 육체적 죄가 다른 영적 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신체적 건강을 회복하기 전에는, 아무리 정신치료를 해 보아야 다 소용이 없다.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좋은 음식을 규칙적으로 제공하기만 해도, 상당수의 환자가 스스로 병든 몸과 마음을 회복한다. 병원에서는 모든 환자의 식사를 매 끼니마다 확인하는데, 필요하면 식사량과 성분까지도 정확하게 계산하여 처방한다. 균형 잡힌 섭식이 건강한 삶의 시작이다. 

약 70년 전,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4만 명을 굶겨 죽였다. 쉽게 씻을 수 없는, 인류에 대한 크나큰 죄악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식이장애로 사망하는 사람은, 적게 잡아도 매년 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대부분은, 의학적으로 ‘굶어’ 죽는다. 탐식으로 인한 사망은 추산하기 어렵지만, 비만으로 인한 직접적인 사망은 미국 내에서만 매년 약 30만 명,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약 3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우리 스스로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2.교만(superbia)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다한 느낌을 갖는다. 자신의 성취나 재능을 과장하고, 별로 성취한 것이 없었음에도 우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한다. 끝없는 성공, 권력, 훌륭함, 아름다움 혹은 이상적인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며, 따라서 특별한 사람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존경을 요구하고, 특혜를 원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한다. 타인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 ‘정신병의 진단기준과 통계상의 지침-4-TR’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진단기준을 일부 옮긴 것이다. 머릿속에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지? 사실 교만의 병, 즉 병적인 자기중심성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스스로 자성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폭로되어도, 그들은 단지 자신의 우월한 재능을 탐내는 시샘 정도로 생각한다. 혹은 열등한 족속들이, 자신의 훌륭함을 도무지 알아보지 못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들이 정신과에 직접 찾아오는 일은 대단히 드물다. 끊임없는 대인관계의 어려움과 만성적인 공허함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의사를 찾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의사의 출신 학교나 명성, 외모, 학위 등만 따지다가, 이내 발길이 끊어지고 만다. 스스로 고통을 잘 느끼지도 않고, 삶의 어려움은 주변의 탓으로 돌리니, 도무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심판한다.


  
▲ '교만', 자크 드 바케.(1555-85)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이 바로 죄 중의 죄, 즉 죄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다른 대죄와 나란히 놓지도 않고, 특별히 별도로 두었다.(기존 여덟 가지 죄를, 일곱에 맞추려 했다는 의견도 있다) 16세기 영국의 성직자였던, 헨리 스미스도 모든 죄의 으뜸이 바로 교만이라고 하였다. 다른 죄는 스스로에게 범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범하는 것이지만, 교만은 바로 하느님께 범하는 죄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의 병, 즉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직 국내 연구는 별로 없지만,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유병율은 약 두 배로 늘어났다. 정신의학 교과서에 의하면, 원래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유병율은 대략 백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16명당 한 명으로 늘어났고, 특히 젊은 층에서 그 증가속도가 빠른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사회가 아직 건강한 긍지와 병적 자만을 잘 구분해 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하는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능력이 특히 부각된다. 강인한 자신감과 완고한 자만심, 거침없는 리더십과 고집 센 독선, 꺾이지 않는 자기 확신과 반성 없는 자기 기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다양한 정신의학적 평가기준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이 두 가치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 추앙하는 자긍심과 자기 확신이라는 긍정의 가치는, 교만과 자기 기만이라는 부정적 가치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건강한 자긍심과 병적 자만이 불러오는 삶의 결과는 아주 다르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환자의 젊은 시절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멋질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상화된 관계를 만들고, 이내 평가절하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추구한다. 글렌 가바드라는 정신의학자는 이를 ‘타인을 빨아들인 뒤에, 빈껍데기는 버리는 대인관계의 양상’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는 건강하게 나이 들지 못한다. 이들은 늦은 나이에야 하는 수 없이 결혼하지만, 배우자가 자신을 원하는 방식대로 대우해 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나이가 들면서 포기해야 하는, 능력과 젊음,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이들의 삶을 점점 무너뜨린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젊은 여성을 찾아다니거나, 혹은 권력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으로 주변을 채우려고 하기도 한다. 혹은 종교에 귀의하여 절대자로서의 신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신이란, 사실 자기 자신을 신이라는 존재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결함을 신의 위대함으로 위장하고, 절대자의 입장에서 타인을 평가하고 심판하려고 한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다. 이야말로 내가 그 누구보다도 우월하다는 증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그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자기애성 인격장애 환자에 대한 정신치료는 아주 어렵다. 정신과 의사의 상당수가 자기애적 성장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의사들은 학창시절 내내, 우수한 학업 성적으로 인해 주변의 칭찬을 당연하게 받아 왔다. 아픈 이를 돌보는 고귀한 직업이라는, 도덕적 당위성도 자기애에 빠지기 쉽게 만드는 조건이다. 사회에서 아주 많은 관심과 존중을 받고 있음에도, 종종 충분히 대우받지 못한다고 여기고는 한다. 내적으로 취약한 정신과 의사는, 심지어 자신을 언짢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당한’ 정신과 진단을 붙여 매도해 버리려는 충동도 느낄 수 있다.

사실 자기애적 경향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러한 내적 속성을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경멸과 분노, 질투의 감정이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을, 잘 포착해 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화를 내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리는 등의 행동을 취한다.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후트는 바로 이때, ‘당신은 바라는 대로 대우받지 못할 때, 상처를 입는군요’라는 말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동료의 정당한 성공과 인정, 직장 후배의 합당한 반박, 상사의 당연한 지적에도, 우리는 상처받는다. 그들에게 분노하고, 그들의 의도를 매도하고, 그들의 성취를 평가절하한다. 내적으로 몸부림치는 그 고통의 순간이, 바로 자기 자신의 교만함을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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