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푹푹 내리고…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은 1936년 4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함흥에 거주한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옮긴 것이다. 백석보다 1년 먼저 영생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은 평론가 백철의 천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석은 새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던지 함흥 거주 1년 7개월 동안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다가 1937년 10월에 시 ‘북관(北關)’을 위시한 7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한다.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북관’ 전문)
‘끼밀다’라는 말은 ‘끼고 앉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자세히 느낀다’는 뜻의 북관 사투리이다. 백석이 투박한 북관을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으며 향토 세계에 젖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다. 여기에 ‘여진’과 ‘신라’라는 어휘가 보태지고 있음은, 백석이 역사적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백석의 시집 ‘사슴’에 담긴 토속적 세계와 북관 시편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며 “성인의 시점에서 관찰한 북관 거주기의 시편은 역사성의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 진흥왕은 국토 확장이라는 미명 하에 함흥지역에 신라 사람들을 이주시킨 뒤 황초령순수비와 마운령순수비를 세웠다. 백석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북관’의 시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즈음, 백석 앞에 홀연히 나타난 여인이 김영한(1916∼1999)이다.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데 이때 김영한은 16세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권번에서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생으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겸비한 진향이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릴 무렵인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신윤국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녀는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함흥 감옥에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진향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지만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 권번에 들어간다. 기생으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날 수도 있고, 스승을 면회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향은 끝내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한다. 대신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인 ‘함흥관’에 갔다가 운명적으로 백석을 만나게 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진향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김자야 에세이 ‘내 사랑 백석’)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은 스물둘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인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한 그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이 담긴 가사였다. 자야는 두 사람끼리 부르는 은밀한 아호였던 것이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1937년 겨울,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의했으나, 자야가 갈등 끝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홀로 경성으로 떠나가자 영생고보 교사직을 버리고 경성으로 와 자야와 동거한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자야가 먼저 경성으로 간 후 백석은 1938년 6월, ‘조선축구학생연맹전’에 참가하기 위해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해 경성으로 축구 원정을 온다. 일주일간의 출장 동안 그는 학생들을 여관에 투숙시킨 채 정작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 하숙집에서 밤을 보냈던 것이다. 그날 밤 학생들은 경성의 호화찬란한 밤 풍경에 현혹된 나머지 극장으로, 찻집으로 쏘다니다가 풍기 단속교사들에게 적발돼 영생고보에 그 명단이 통보되고 말았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징계 차원에서 백석을 영생여고보로 전근시킨다. 이에 백석은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경성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백석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살림을 시작한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기며 부부처럼 생활했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이 시절에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두 사람의 사랑은 뜨겁고 진지했지만 백석의 부모는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39년 1월 백석이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을 무렵, 아버지 백영옥은 조선일보 사진반에서 퇴직해 뚝섬 근처인 경성부 외서둑도리 656번지에 주소를 두고 식솔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석은 부모와 동생이 살고 있는 본가에 가지 않고 신문사와 거리가 가까운 자야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혼례를 서두른다. “39년 1월에 백석은 장가를 들러 충북 진천에 두 번이나 갔다가 왔다. 1월 6일 금요일 소한(小寒)에 내려가 며칠을 머물다 서울로 와서 1월 21일 토요일에 다시 내려가면서 대한(大寒)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천에 내려가서 혼례를 치르고 올라왔는데 이때 신부는 역시 부잣집 딸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모가 강요해서 치른 결혼식은 그 후 신혼생활이 길지 않고 별거한 것으로 알려졌다.”(송준의 ‘시인 백석 일대기’)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그 출처나 증언자가 밝혀지지 않아 곧이곧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백석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자야와 함께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백석은 집안의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도피하자고 또 다시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하고 만다.
“당신은 무언의 반항으로 그 지존하신 어버이에게 감히 등을 돌리고 머나먼 이국땅 북만주 황야로 떠나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당신은 침통한 얼굴이 되어서 대답했다. ‘나에게는 정말 피치 못할 딱한 사정이 있소. 당신은 죄 없이 쫓겨 다니는 고생 속에 있고, 나 또한 집에 들어가서 편안히 등을 붙일 단 한 칸의 방이 이 땅에는 없어요!’”(김자야 ‘내 사랑 백석’)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떠나는데, 자야는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1939년 10월 21일,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다시 사직하면서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100편을 가지고 오리라”고 다짐하며 만주로 향했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
김재용(납북월북작가 전문가·원광대 교수)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이숭원(한국시학회 회장·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