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백석과 자야

tlsdkssk 2019. 11. 22. 07:37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④ 함흥과 나타샤와 이별

[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④ 함흥과 나타샤와 이별 기사의 사진


눈은 푹푹 내리고… 세상 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은 1936년 4월부터 1938년 12월까지 함흥에 거주한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옮긴 것이다. 백석보다 1년 먼저 영생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은 평론가 백철의 천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석은 새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던지 함흥 거주 1년 7개월 동안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다가 1937년 10월에 시 ‘북관(北關)’을 위시한 7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발표한다.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북관’ 전문)

‘끼밀다’라는 말은 ‘끼고 앉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자세히 느낀다’는 뜻의 북관 사투리이다. 백석이 투박한 북관을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으며 향토 세계에 젖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다. 여기에 ‘여진’과 ‘신라’라는 어휘가 보태지고 있음은, 백석이 역사적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백석의 시집 ‘사슴’에 담긴 토속적 세계와 북관 시편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며 “성인의 시점에서 관찰한 북관 거주기의 시편은 역사성의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 진흥왕은 국토 확장이라는 미명 하에 함흥지역에 신라 사람들을 이주시킨 뒤 황초령순수비와 마운령순수비를 세웠다. 백석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북관’의 시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즈음, 백석 앞에 홀연히 나타난 여인이 김영한(1916∼1999)이다.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데 이때 김영한은 16세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권번에서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생으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겸비한 진향이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릴 무렵인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신윤국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녀는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함흥 감옥에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진향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지만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 권번에 들어간다. 기생으로 있으면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날 수도 있고, 스승을 면회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향은 끝내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한다. 대신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인 ‘함흥관’에 갔다가 운명적으로 백석을 만나게 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진향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김자야 에세이 ‘내 사랑 백석’)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은 스물둘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인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한 그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이 담긴 가사였다. 자야는 두 사람끼리 부르는 은밀한 아호였던 것이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1937년 겨울,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의했으나, 자야가 갈등 끝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홀로 경성으로 떠나가자 영생고보 교사직을 버리고 경성으로 와 자야와 동거한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자야가 먼저 경성으로 간 후 백석은 1938년 6월, ‘조선축구학생연맹전’에 참가하기 위해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해 경성으로 축구 원정을 온다. 일주일간의 출장 동안 그는 학생들을 여관에 투숙시킨 채 정작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 하숙집에서 밤을 보냈던 것이다. 그날 밤 학생들은 경성의 호화찬란한 밤 풍경에 현혹된 나머지 극장으로, 찻집으로 쏘다니다가 풍기 단속교사들에게 적발돼 영생고보에 그 명단이 통보되고 말았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징계 차원에서 백석을 영생여고보로 전근시킨다. 이에 백석은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경성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백석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살림을 시작한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기며 부부처럼 생활했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이 시절에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두 사람의 사랑은 뜨겁고 진지했지만 백석의 부모는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39년 1월 백석이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을 무렵, 아버지 백영옥은 조선일보 사진반에서 퇴직해 뚝섬 근처인 경성부 외서둑도리 656번지에 주소를 두고 식솔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석은 부모와 동생이 살고 있는 본가에 가지 않고 신문사와 거리가 가까운 자야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혼례를 서두른다. “39년 1월에 백석은 장가를 들러 충북 진천에 두 번이나 갔다가 왔다. 1월 6일 금요일 소한(小寒)에 내려가 며칠을 머물다 서울로 와서 1월 21일 토요일에 다시 내려가면서 대한(大寒)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천에 내려가서 혼례를 치르고 올라왔는데 이때 신부는 역시 부잣집 딸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모가 강요해서 치른 결혼식은 그 후 신혼생활이 길지 않고 별거한 것으로 알려졌다.”(송준의 ‘시인 백석 일대기’)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그 출처나 증언자가 밝혀지지 않아 곧이곧대로 믿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백석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자야와 함께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했던 것이다. 백석은 집안의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도피하자고 또 다시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하고 만다.

“당신은 무언의 반항으로 그 지존하신 어버이에게 감히 등을 돌리고 머나먼 이국땅 북만주 황야로 떠나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당신은 침통한 얼굴이 되어서 대답했다. ‘나에게는 정말 피치 못할 딱한 사정이 있소. 당신은 죄 없이 쫓겨 다니는 고생 속에 있고, 나 또한 집에 들어가서 편안히 등을 붙일 단 한 칸의 방이 이 땅에는 없어요!’”(김자야 ‘내 사랑 백석’)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떠나는데, 자야는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1939년 10월 21일,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다시 사직하면서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100편을 가지고 오리라”고 다짐하며 만주로 향했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

김재용(납북월북작가 전문가·원광대 교수)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이숭원(한국시학회 회장·서울여대 교수)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776080











큰사진보기 백석시집 표지 특이한 머리를 한 모습으로 영어수업하는 장면
▲ 백석시집 표지 특이한 머리를 한 모습으로 영어수업하는 장면
ⓒ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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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를 만났다. 아니 백석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표지에서 그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참 특이하다. 그 옛날에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격조였다. 그의 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를 느끼게 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사슴>을 읽은 저녁, 밥도 반 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노라고 고백했다. 신경림 시인처럼 백석의 시 한 편이, 아니 시 한 연, 한 행이 주는 전율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 전율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나 역시 밤을 밝혔다. 백석의 시는 시어가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읽으면 가슴에 깊은 떨림으로 남았다. 문학의 위대한 힘을 나는 알고 있다. 시 한 편 때문에 삶을 다시 찾은 사람들, 책 한 권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의 힘을 웅변으로 말해주었다.

백석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백석의 천재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노리다께 가스오라는 일본 시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15년 정도를 당시 조선에서 보내 한국 문인친구들을 많이 두었던 그는 일본 후꾸이현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 <파>에서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백석을 노래하고 있다. 노리다께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덕이 있어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화가 이중섭은 그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어를 정주 사투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투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쓰지 않아 묻혀있는 우리 고유 언어에 낯선 우리에게 백석의 시는 각주를 보면서 읽어야 하지만 토속적인 시어로 전혀 어렵지 않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멍멍이 짓는 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냇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만날 수 없었지만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고향>이라는 시를 통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의 연보를 보면 1957년 46세까지의 활동이 나와 있고 1963년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을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실제 사망은 1995년 84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963년에서 1995년까지 32년이라는 그 긴 세월동안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빛나는 시들을 얼마나 많이 쏟아냈을까. 그 시들은 어디 있을까?

북한은 계관시인 칭호제도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남북이산가족 첫상봉 때 북쪽의 계관시인이었던 오영재 시인이 가족을 찾아 내려왔지만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등 그의 시 몇 편을 보면 토속적이거나 서정성은 기대만큼 높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토록 격조 높은 시를 썼던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찾아보니 30대에 연금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우익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상당한 곤란을 겪어 나중에는 북한의 문인인명록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권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창작 집필은 금지당할 정도로 북한문단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다. 천재시인에게 창작금지는 얼마나 잔혹한 형벌인가.

고 이응로 화백은 감옥에서 끌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를 식사때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간장이나 밥알로 풀어냈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창작력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을 보면서 인간이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두지 못함을 보았었다. 백석은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다 눈을 감았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시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는데 후반부에서는 시인 자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이런 시상을 떠올려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치 누군가 읊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과 평론가 등 문인 120명으로부터 2년 연속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그 시를 쓴 뒤 탈진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백석도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 아니면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한 번에 완성했을까.

  (앞부분 생략)
-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런 시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챈 일본의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 앞에서 자신은 무명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름도 몰랐던 시인 백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야라고 불렀던 그의 연인 김영한 때문이었다.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여인이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대원각은 기부 당시 재산가치가 1000억 원대였다고 한다. 백석은 북에서 1995년 사망했으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그들은 영적으로 무언가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지낼 때 겨울이 너무 추워 미국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책을 번역하고 설법을 하며 지냈는데 그때 김영한 보살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조건 없이 시주했고 사찰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깊은 불심인지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었다.

또한 그녀로 하여금 이런 깊은 불심을 자아내게 만든 법정스님의 그릇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이런 진정어린 신뢰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길상사는 올해로 개원 12주년을 맞았는데 법정스님은 해마다 12월 14일 개원일에 가까운 일요일에 봉행되는 개원법회에 참석해 대중법문을 해왔으나 올해는 불참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법정스님은 폐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는 와병중으로 제주도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기부한 1000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 그는 바로 백석이었다. 김영한, 그녀는 최고의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자야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길목에서 20대에 만난 그들은 비련의 연인들이었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시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3년 동안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그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자야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저서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전한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여사에게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영국쯤에나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를,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백석의 약력을 보면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백석이 자야라 불렀던 연인 김영한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는데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냉정해서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이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는데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으며, 올해는 안도현 시인이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달에 수상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정주 토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향토색이 물씬 풍긴다. 언어유희도 없이 담백하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닌데도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모두 금지도서가 되어 우리 세대는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개인사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던 비련과 비운의 천재 시인이었다.

1987년 해금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이동순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선집'을 펴내자 자야 여사가 연락해와 그들의 슬픈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평생을 간직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 세상에는 천억 원이 넘는 대사찰을, 연인에게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백석문학상을 남겨주고 간 아름다운 여인, 김영한. 그들의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은 남북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남북분단이 그의 문학 또한 막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시문학이 얼마나 더 성큼 발전했을까. 생각할수록 분단의 비극이 곳곳에 남긴 손실과 상흔의 슬픔에 가슴이 아파온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던 백석은 자신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남겨졌다. 그의 시와 비련의 사랑, 그리고 그의 연인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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