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진달래꽃

tlsdkssk 2015. 7. 28. 09:06

진달래꽃

             시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해 설
이 시는 소월시의 정수(精髓)로, 이별의 슬픔을 인종(忍從)의 의지력으로 극복해 내는 여인을
시적 자아로 하여 전통적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 정한의 세계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아리랑>으로
계승되어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와 그 맥을 같이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과 애수로 일컬어지는 한국적 고유 정서와 전통적 민요조 가락은 소월시를 이루는
두 원소(元素)이자, 소월시를 존재하게 하는 두 원인(原因)이다.
민족 최대ㆍ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소월이 남긴 150여편의 시는 생전에 간행한 시집
<진달래꽃>으로 묶였고, 사후(死後)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에 이어 지금까지 수많은
시집이 간행되어 최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시가 전국민의 절대적 사랑을 받게 된 원동력과 흡인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소월시가 남과 다른 숭고한 이념이나 사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요,
시대적 고뇌를 온몸으로 포용하고 있는 지사적(志士的) 풍모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모두(冒頭)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 속에는 민족의 고유 정서와 맞닿아
흐르는 어떤 소박하고 진솔한 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가락,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구화체(口話體)를 활용한  7ㆍ5조의 대중적
리듬과, 이별ㆍ그리움ㆍ체념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적 주제 의식을 담고 있어 한국인 이라면
누구나 쉽게 그 전통적 정서에 닿게 되어 소월시만이 갖는 처절한 호소력과 강렬한 감동을
전수받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유교적 휴머니즘을 사상적 배경으로, 낭만주의적 서정을
민요풍인  7ㆍ5조의 기본 리듬에다 용해시켜서 임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
승화된 이별의 한’을 아름답게 표현한 순정적인 서정시다.
‘산화공덕(散花功德)’의 마음이 물씬 풍기는 데, 산화공덕이란(불교에서는‘散華’라고 씀)
부처님이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걸음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 시에서 진달래꽃을 뿌려, 가는 걸음에 영화의 축복을 비는 것은 원망(怨望)을 초극한
고귀한 애정의 발로이다.
이 시는 임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붉게 타는 진달래꽃에 담아,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는 임의 앞길에 뿌리겠다는 이별의 한을 눈물겹도록 승화시킨 작품이다.
【개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순수시, 낭만시
▶제재 : 진달래꽃
▶성격 : 서정적, 유교적, 향토적, 전통적, 민요적, 토속적
- 전통시의 요소 : 소재, 율격, 유교적 휴머니즘
▶경향 : 유교적 휴머니즘
▶미감(美感) : 애상미(哀傷美)
▶심상 : 시각적 - 임이 가실 길에 뿌려진 약산의 진달래꽃의 이미지
▶표현상 특징 : 반복적인 리듬과 음악성이 돋보임
① 7ㆍ5조의 기본 리듬에다 자신의 설움을 지그시 누르는 의지를 나타냈다.
② ‘영변의 약산’이라는 실제의 지명을 끌어씀으로써 향토적 정서를 돋우었다.
③ 시행(詩行)의 도치(倒置)로 변화를 도모했고, 시행(詩行)의 반복으로
     수미상관(首尾相關)을 이루었다.
④ 향토적 색채, 정중, 은근함(∼오리다, ∼오소서)
⑤ 생략법, 도치법, 반복법, 역설법, 명령법, 점층법(1∼3연)
▶어조 : 여성적
▶운율 : 7ㆍ5조의 3음보 율격(민요적), 3ㆍ4조의 민요적 운율, 전통적 가락
- 각운의 요소 : 종결어미 '오리다' (1, 2, 4연)
▶내용상 특징
① 유교적 휴머니즘(哀而不悲), 여성 편향적, 향토 정서
② 토속적 사투리와 사랑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처리한 서정시의 백미
③ 순종의 미덕이 잔잔하게 깔려 있으면서 내면으로는 여성의 강한 만류의
     뜻이 담겨 있음.
④ ‘진달래꽃’의 상징(자기 희생, 헌신적 사랑과 축복) 이외엔 비유가 일체
     없이 직서법(直敍法)으로 감정 표현.
▶주제 : 승화된 이별의 정한(情恨)
【어구 풀이】
<역겨워> : 마음에 거슬리고 싫어
<영변> : 평안북도에 있는 지명
<약산> : 약산 동대를 가리키는 말. 관서 팔경의 하나로, 진달래가 곱기로 유명함.
<뿌리오리다> : 꽃과 연결하여 불교의 산화(散華), 축복의 행위.
<사뿐히> :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내디디는 모양
<즈려> : '꾹 눌러'의 평안도 사투리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 : 이 시에 설정된 시적 자아의 정황은 아직 이별이
실현되기 이전이다. 그러면서도 그 이별은 이미 운명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다.
임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앞질러 이 쪽에서 이별을 간접적으로 미리 다짐한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 이별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이지만,
유교적 인고의 덕을 익혀온 우리의 여인들은 체념과 희생의 자세를 취하여 가는 임을
붙들지 않았다. 하지만 표면상 체념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간절한 미련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특정 지명을 내세워 향토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진달래꽃으로 서정적 자아의 마음 속에 열렬한 사랑을 표현했다.
<가시는 걸음 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예로부터 귀하고 높은 이가
밟는 길에는 융단을 깔거나 꽃을 뿌려 밟고 가게 하거나 몸을 던져 엎드려 그 위를 딛고 가게
하여 사모의 정을 나타냈다.
시적 자아가 꽃을 뿌리는 것은 가시는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축복의 표현이다.
따라서 진달래꽃은 시적 자아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는 분신으로 그 마음을 밟고 가는 사람은
영원토록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애이불비(哀而不悲 ) -
슬프지만 겉으로 드러내어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겠다는 것. 이 시의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은 실은 너무 슬퍼 피눈물을 흘리고 있겠다는 것의 아이러니(반어)이다.
고조된 감정을 수미 상응의 결구법으로 승화시켰다. 반어, 도치
【구성】- 수미상관
▶1연 : 기 - 이별 - 체념을 통한 이별의 정한(情恨) - 유교적 휴머니즘
▶2연 : 승 - 사랑 - 떠나는 임에 대한 축복 - 향토적 서정을 통한 사랑의 진실
▶3연 : 전 - 희생 - 원망(怨望)을 초극한 고귀한 사랑 - 슬픔의 승화와 축복
▶4연 : 결 - 극기 - 인고(忍苦)의 의지로 이별의 정한(情恨) 극복 - 자기극복의 역설(逆說)
【감상】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 때 그것을 붙잡고자 함은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간곡하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면 그런 때는 어찌할 것인가?
그런 일을 스스로 겪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 있는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달래꽃>은 하나의 시적 해답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의 인물은 님이 떠나실 때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노라고 한다.
제2, 3연에서는 영변의 약산에 핀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다 길에 뿌려 놓을 터이니 그것들을
걸음마다 밟고 가시라고 한다. 그리고는 한번 더 강조하여, 님이 떠나실 때에는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노라고 한다. 어차피 떠날 수밖에 없는 님이라면, 그리고 떠나는 것이
진실로 님이 바라는 일이라면 굳이 붙잡지 않겠노라는 비장한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의미가 전부라면 <진달래꽃>은 별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 되지
못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문제는 위의 내용이 작중 인물의 진심과는 다른 반어적
표현 내지는 역설이라는 데 있다.
비록 말의 표현에서는 떠나는 님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하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말이 아니다.
진심은 그 반대이다. 그는 님이 떠날 때 도저히 그렇게 보낼 수 없을 만큼 절실한 사랑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들은 그 깊은 의미에서는 오히려 표면의 문맥과는 반대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제2, 3연의 말들을 좀더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님이 가시는 길에 뿌리는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 꽃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의 사랑이기도 하다. 가시는 걸음마다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 달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깊은 사랑을
떠나는 님에게까지도 아끼지 않으려는 정성의 표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마
그 아름다운 사랑을 밟으며 떠날 님에의 원망과 한이 서리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애절한 사랑과 슬픔 그리고 한을 나지막한 호소의 말씨에 실어 노래한 데에
<진달래꽃>의 간절한 뜻이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말하듯 고려 가요의 <가시리>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가시리>의 작중
인물이 님에게 `가시는 듯 돌아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기다림의 여유가 있었던 데 비해 이
작품은 그만한 기다림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분위기와 슬픔을 띠고 있다.
(해설: 김흥규)

승화된 이별의 정한(情恨)이라고 일단 이해할 수 있는 이 시의 주제는 전통적 시가인
<가시리>나 황진이의 시조 '어저, 내 일이야…'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달래꽃>에서 그러한 주제를 이끌어 내는 것만으로 작품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듯한 이 시적 진술 속에는 한마디로 단정되기 어려운,
아주 미묘하고 야릇한 감정의 움직임이 엿보인다. 여성으로 짐작되는 이 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 적어도 결코 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진심을 그 속에 숨겨 놓고 있다. 표면적인
과장과 허세가 역설적으로 그의 내면적 진실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 특유의 과장은 제2,3연에서 확인된다.
임이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릴 테니 그것을 즈려 밟고 가 달라고 화자는 말한다.
떠나가는 사람 앞에 꽃을 뿌린다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행위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이 변함없다는 데 있다.
그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산화공덕(散花功德)' 즉, 임의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 걸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뜻에
매달려 시를 이해할 때, 우리는 거기서 한 여인의 비현실적이고 싱거운 포부밖에는
발견하지 못한다. 이 축복의 이면에는 오히려 가겠다는 임을 강력히 만류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양하(李敭河) 교수는 <소월의 진달래와 예이츠의 꿈>에서 그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B.Yeats, 1865-1939)의 <하늘 나라의 옷>을 읽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예이츠의 '꿈'은 소월의 '진달래'에 상응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그들이 가진 모든
것 즉, 혼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진달래는 그것이 지닌 붉은 색감에 의해 '불타오르는
사랑'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준다. 그리하여 '사뿐히 즈려 밟고'라는 말은 나의 사랑을 무참히
짓밟지는 말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화자가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사랑이
여성화된 꽃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된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 그러나 가장 잘못 읽혀져 온 시-그것이 바로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진달래꽃>이 이별을 노래한 시라고만 생각해왔으며
심지어는 대학입시 국어 문제에서도 그렇게 써야만 정답이 되었다.
하지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라는 그 첫 행 하나만
조심스럽게 읽어봐도 그것이 결코 이별만을 노래한 단순한 시가 아니라는 것을 간단히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가실 때에는…', '…드리우리다'와 같은 말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듯이
이 시는 미래 추정형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영문 같았으면 'If'로 시작되는 가정법과 의지
미래형으로 서술되었을 문장이다.
이 시 전체의 서술어는 '…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옵소서' '…흘리우리다'로 전문에
모두 의지나 바람을 나타내는 미래의 시제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로 보면 지금 님은 자기를 역겨워하지도 않으며 떠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 이별은커녕 열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이 시를 한국 이별가의 전형으로 읽어온 것은 미래추정형으로 된 <진달래꽃>의 시제를
무시하고 그것을 현재나 과거형으로 진술한 이별가와 동일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가요 <가시리>에서 시작하여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아리랑>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이별을 노래한 한국시들은 백이면 백 이별의 그 정황을 과거형이나 현재형으로
진술해 왔다. 오직 김소월의 <진달래꽃>만이 이별의 시제가 미래추정형으로 되어 있고 시
전체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해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의 시적 의미를 결정짓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른 시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 같은 시의 시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미래추정형의
시제를 실제 일어났던 과거형으로 바꿔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그대를 말없이 고이 보내
드렸었지요'로 고쳐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이미 소월의 진달래꽃과는 전혀 다른 시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달래꽃>을 이별의 노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은'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이라는 옛 가요를 듣고 그것이 백만장자의 노래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시 음치에 속하는 일이다. 그 같은 오독이 <진달래꽃>을 읽는 시의 재미와 그 창조적인
의미를 얼마나 무참히 파괴해버렸는가는 췌언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오독으로 인해서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같은 시의 역설이 한국 여인의 부덕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이 시를 명심보감이나 양반집 내훈의 대역에 오르도록 했다. 자기를
역겹다고 버린 님을 원망은커녕 꽃까지 뿌려주겠다는 인심 좋은 한국 여인의 관용이,
그리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겠다는 극기의 그 여인상이 <진달래꽃>의 메시지였다면
그 시는 물론이고 <진달래꽃>의 이미지조차도 우스워진다. 그렇다. 그런 메시지에 어울리는
꽃이라면 그것은 저 유교적 이념의 등록 상표인 '국화'요 '매화'일 것이다.
<진달래꽃>은 결코 점잖은 꽃, 자기 억제의 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가축화한 완상용 꽃이 아니다. 오히려 겨우내내 야산의 어느 바위틈이나 벼랑가에
숨어 있다가 봄과 함께 분출한 춘정을 주체할 바 모르는 야속(野屬)의 꽃인 것이다.
더구나 영변 약산에 피는 진달래꽃은 그 색깔이 짙기로 이름나 있다. 온 산 전체를 온통
불태우는 꽃으로, 신윤복의 그림 <연소 답청>에서 보듯 남자들과 나귀 타고 산행을 하는
기녀들의 머리에 꽂았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인 것이다. 그런 진달래가 이별의 슬픔을
억제하고 너그러운 부덕을 상징하는 자리에 등장하는 꽃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유교사회에 있어 진달래꽃은 그 흔한 화조병풍이나 화투장에서마저도 멀찌감치 물러나
앉은 반문화적 꽃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째서 <진달래꽃>이 어둡고 청승맞은 4ㆍ4조의 우수율이 아니라
밝고 경쾌하며 조금은 까불까불한 느낌조차 주는 7ㆍ5조의 기수율로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별가의 침통한 가락이 아니다. 약간은 수줍게 그러면서도 철없이
불타오르는<진달래꽃> 같은 사랑의 언어들, 때로는 장난기마저 깃든 천진난만한 ‘소녀의
기도’ 소리의 율동을 들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밤의 어둠을 바탕으로 삼지 않고서는 별빛의 영롱함을 그려낼 수 없듯이
이별의 슬픔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할 수 없는 역설로 빚어진
것이 바로 소월의 <진달래꽃>인 것이다. 즉 이별의 가정을 통해 현재의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이다. 이별을 이별로써 노래하거나 사랑을 사랑으로 노래하는 평면적 의미와
달리 소월은 사랑의 시점에서 이별을 노래하는 겹시각을 통해서 언어의 복합적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라는 대립된 정서, 대립된 시간
그리고 대립된 상황을 이른바 ‘반대의 일치’라는 역설의 시학으로 함께 묶어 놓는다.
그래서 사랑을 반기고 맞이하는 꽃이 여기에서는 반대로 이별의 객관적 상관물이 되고,
향기를 맡고 머리에 꽂는 꽃의 상부적 이미지가 돌이나 흙과 같이 바닥에 깔리거나 발에
밟히는 하부적 이미지로 바뀐다. 그러한 꽃의 이미지 때문에 가벼움을 나타내는 ‘사뿐히’와
무거움을 나타내는 ‘밟다’라는 서로 모순하는 어휘가 하나로 결합하여 ‘사뿐히 즈려밟고’의
당착어법이 되기도 한다.
소월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산에 핀 진달래거나 혹은 여인의 머리나 나무꾼의 지게에
꽂아진 진달래의 그 아름다움밖에는 모를 뻔했다. 그러나 반대의 것을 서로 결합시키는
소월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진달래만이 아니라
슬픈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밟히우면서 동시에 희열로 피어나는 또 다른 가상공간의
진달래꽃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그것이 바로 이별의 슬픔을 통해서 사랑의 기쁨을
가시화하는 역설 또는 아이러니라는 시적 장치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시의 복합적 의미는 반드시 한 항목만을 골라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사지 선다의 객관식 답안지로는 영원히 도달될 수 없는 세계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의 마지막 구절을 눈여겨보면 산문과는 달리 복합적
구조를 가진 시적 아이러니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느 평자도 지적한 적이
있지만 산문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와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우리다’는 조금도 뜻이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부정을 뜻하는 ‘아니’가 ‘눈물’ 앞에 오느냐 뒤에 오느냐로 시적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아니’가 뒤에 올 때에는 단순히 평서문으로서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진술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아니가 눈물 앞에 올 때에는 그 부정의 의미가
훨씬 강력해진다. ‘아니’라는 말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강력한 부정일수록 긍정으로 들리는 시의 역설이 생겨나게 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한 세기 가까이 긴 세월을 두고 오독되어온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 역겨움과 떠남이 미래형으로 서술되고 있는 한
‘사랑’은 언제나 ‘지금’인 것이다.
사랑을 현재형으로, 이별을 미래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소월의 특이한 시적 시제
속에서는 언제나 이별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랑의 기쁨과 열정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구실을 한다. 그러한 모순과 역설의 이중적 정서를 가시화하면 봄마다 약산 전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그러면서도 바위틈 사이에서 하나 하나 외롭게 피어나는
진달래꽃잎이 될 것이다.
4연 12행의 간결한 시 형식 속에는 한 여인의 임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체념과 극기(克己)의 정신이 함께 용해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떠나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는 동양적인 체념과, '나 보기가 역겨워
' 떠나는 임이지만, 그를 위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절대적 사랑,
임의 '가시는 걸음 걸음'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을 때, 이별의 슬픔을 도리어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 그리고 그 아픔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인고(忍苦)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진달래꽃'이다.
이 '진달래꽃'은 단순히 '영변 약산'에 피어 있는 어느 꽃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을 표상하기 위하여 선택된 시적 자아의 분신이다. 다시 말해, '진달래꽃'은
시적 자아의 아름답고 강렬한 사랑의 표상이요, 떠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며,
끝까지 임에게 자신을 헌신하려는 정성과 순종의 상징이기도 하다.
떠나는 임을 위해 꽃을 뿌리는 행위가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까닭은
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의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꽃을 뿌리는 행위의 표면적 의미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산화공덕(散華功德)'
임이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임의 앞날을 영화롭게 한다는'축복'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임을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한 만류의 뜻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저 이별을 노래하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의 문제로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월은 그의 다른 대표작인 <산유화(山有花)>에서처럼, 여기서도
'진달래꽃'의 개화와 낙화를 사랑의 피어남과 떨어짐, 즉 만남과 이별이라는 원리로
설정함으로써 마침내 사랑의 본질을 깨달은 그는 더 나아가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생성과 소멸의 인생의 의미를 깊이 인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버림받은 여인과 떠나는 남성간에 발생하는 비극적 상황이 초점을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
여성의 인종(忍從)과 남성의 유랑(流浪) 및 잠적(潛跡)를 원형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여성 편향의 '드리오리다'ㆍ'뿌리오리다'ㆍ'가시옵소서'ㆍ'흘리오리다' 등의 종지형을
의도적으로 각 연마다 사용함으로써 더욱 애절하고 간절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피학적(被虐的, masochistic)이던 시적 자아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마지막 시행과, '걸음 걸음'ㆍ'즈려 밟고 가시옵소서'에서 나타나듯이 그저 눈물만 보이며
인종하는 나약한 여성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떠나는 남성이 밟고 가는 '진달래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바로 여성 시적 자아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꽃을 밟을 때마다
자신이 가학자(加虐者, sadist)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것을 아는 시적 자아는
그러한 고도의 치밀한 시적 장치를 통해 떠나는 사랑을 붙잡아두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국민시인, 민중시인의 칭호에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김소월이다.
그만큼 그는 널리 알려져 있고, 널리 읽혔다. 그가 남긴 150여 편의 시는 생전의 시집으로
<진달래꽃>(1925)이 있었고,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가
간행되었지만, 이 두 권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그 동안 약 40여 종류의 여러 이름으로
간행되기에 이른다. 그 발행 부수가 몇십만 부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소월의 소생(所生) 4남 2녀 중 3남 정호(正鎬)가 반공포로로 이남에 남았다가 신분을 밝히고
나섰을 때, 소월의 시집을 마구 찍어내던 출판사들은 비로소 주춤했다.
유족에게 인세(印稅)를 지불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소월의 시가 널리 읽힐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의 시는 이해하기 쉬운 표현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민요조에 담긴
그의 시는 쉽고 간결한 가락, 소박하고 친근한 구화체(口話體)의 정수(精髓)를 활용한 7․5조가
바탕을 이루어 누구보다도 대중적 리듬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그의 시의 소재나 내용이 매우 보편성을 띤 정서라는 점이다. 그의 시는 관념적인
철학이나 또는 기괴한 명상이 아니라, 국민적ㆍ대중적인 주제의 이별ㆍ그리움ㆍ한숨ㆍ
체념 등에 한정되어 있어, 누구나 친숙할 수 있는 내용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소월 시의 생명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통적ㆍ근본적인
정서에 닿아 있고, 누구보다도 처절한 호소력, 강렬한 감동을 지닌 잇점이 있다.
<진달래꽃>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다. 이 작품을
두고 ‘무색(無色)한 시단(詩壇)에 비로소 소월의 시가 있다’(박종화)고 했으며, ‘이 이상 더
깊고, 맵고, 서럽게 표현될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박두진)고도 했다.
이 시에서 작중화자인 ‘나’는 여성으로 본다. 지금까지 이 시의 주인공을 사나이로 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시의 톤(tone)이 여성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진달래꽃’의
빨간 사랑의 이미지는 버림을 받아 피흘리는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시적인 확대가
가능해진다.
둘째, 이 시는 고려가요 <가시리>와 전통적인 선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다.
두 노래의 모티브가 모두 ‘별리(別離)의 정한(情恨)’에서 비롯되며(이 점에서는 ‘아리랑’도 같다),
똑같이 여성의 처지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월의 시와 <가시리>가 슬픔을 참고 임을 곱게 보내드린다는 점에 일치한다.
그러나 <진달래꽃>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적 사랑을 나타낸 데 비하여 <가시리>는 곧
돌아오라는 구속력을 보이고 있다. 정신적 높이에서 소월의 시가 훨씬 앞서고 있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시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여인의 사무친 정(情과) 한(恨)이
이타적(利他的)ㆍ희생적인 고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고, 세련된 정서와 함께
비단결처럼 조화된 시이다.
그러면서도 민족적인 전통 정서에 닿아 있어 민족문화의 유산으로서도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하겠다. (조남익: <현대시 해설>)

소월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시인이고 이 <진달래꽃>은 그의 시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이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 작품을 형식과 내용면에서
분석하여 보면,이 시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맨 먼저 이 시의 형식면의 특징으로 풍부한 음악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의 시는 자유시라고는 하나, 아직도 과거의 정형시의 습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 모든 시작(詩作)에는 다분히 음악성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간결을 특색으로 하는 소월시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짙었다.
이 시의 형태를 분석하여 보면, 자유시라고는 하나, 제2연의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만이 거의 4ㆍ4조에 가까운 음수이고 그 밖의 모든 부분은 7ㆍ5조의 음수로
배열되어 있다. 제1연의 제1행과 제2행, 그리고 제4연의 제1행과 제2행은 각각 행이
구분되어 있긴 하나, 읽을 때에는 그것들이 합쳐져 7ㆍ5조가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정형시의 리듬이 그대로 우러나 아직도
시의 음악성에 귀가 익은 독자들에게 이 시는 매우 친근감을 주게 된다.
다음 이 시의 몇 군데에서는 역시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기 마련인 토속어를 효과 있게
활용하고 있다. 제1연과 제4연에 쓰인
‘역겨워’라는 사투리와 제3연 제 3행 중간에 쓰인 ‘즈려’라는 사투리가 바로 그것이다.
‘즈려’는 평안북도에서 쓰는 ‘짓밟고’의 ‘짓’에 해당하는 사투리다.
이 경우 ‘즈려’밟고‘를 만일 ’짓밟고‘와 같은 표준어로 썼다면, 그 어감이 너무 강하여
바로 그 위의 ’사뿐히‘라는 말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더욱 큰 매력은 상상적 과장에 있다. 과장은 낭만시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과장의 역할은 미를 낳게 하는 데 있다. 사실과는 관계없이
낭만시는 이 과장에 의해 미적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이 시인이 떠나는 임의 발 앞에 진달래꽃을 깔아준다는 것은 현실에 있는
사실이 아니고, 과장된 상상적인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과장에서
어딘가 독특한 미를 느끼고 감동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여러모의 형식미도
이 시를 값있게 하거니와, 이 시의 정신은 그러한 형식미와 함께 이 시를 더욱
 값있게 한다.
저를 버리고 가는 임에게 저버림을 당하는 상대자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태도와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원망 아니면 저주, 횡포 아니면 애걸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 어느 것도 인간적인 품위와 여운을 남길 수 없고, 사랑으로서의 패배자까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참된 인간으로 취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체념뿐이다.
소월은 이 시에서 이러한 체념을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로 표현하고 있다. 체념은 결코 무능과 무력의
소치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굳센 이성의 발로이며, 이성의 미이다.
흔히 체념을 무력한 한국 민족의 패배주의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이
없지 않으나, 서구문학의 남상(濫觴)인 희랍의 고전―그 중에서도 뛰어난 고전인
비극을 읽어보면, 희랍인들은 항거할 수 없는 운명에는 체념으로 대하고 있다.
항거할 수 없는 것에 항거해서는 안 될 것에
부질없이 항거하는 것은 추태일 뿐 그것이 진정한 용기는 아니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며’,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체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용기이며 이성미(理性美)의 참된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사랑은 잃었을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김현승: <한국 현대시 해설>)

소월의 시 대개가 그렇지만, 특히 이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인 한(恨)을
노래한 시이다. 거기다 그는 또 시작(詩作)에 있어서 민요적인 서정 위에 일상적인 토속어를
구사함으로써 한국 민족이면 누구나가 쉽게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다.
정 붙이고, 말 붙이고, 몸을 섞으며 살다가도 사람은 하루아침에 이별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버리고 버림을 받는 인간 관계라면 버림을 받는 쪽의 분함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에서 이와 같은 단순한 애정의 갈등,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한 제1연 제1행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가는 임도 ‘나 보기가
역겨워’서가 아니라, 만부득이 떠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가지 않을 수
 없는 임, 임의 가슴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지만, 보내는 마음이 또한 쓰리고 아파
‘나 보기가 역겨워’서 가는 것이라고 앙탈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끝내 떠나지 않을
수 없음을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알고 있기에, 말없이 진달래를 따다 그 길에 뿌린다.
그 꽃을 밟고 가라고, 그리고 죽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울어서 무엇하랴.
이 시가 1922년 「개벽「지에 발표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보더라도 민족의 가슴에도
슬픔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임(조국)은 이 민족의 슬픔을 뿌리치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의 좌절이 더욱 이와 같은 절망적 비애를 고조케 했을 것이다.
반드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과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이 시는 역사를 통해 한을 안고
살아온 민족의 비애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보기 싫다고 떠나는 임의 가는 길에 말없이
 꽃을 깔아주고, 돌아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이 진달래 빛깔의 슬픔은 우리 민족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권웅: <한국의 명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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