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송재학 시

tlsdkssk 2015. 7. 22. 07:26

죽음과 삶에 대한 모호함의 경계선

-송재학<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이 은서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뜨지 못하리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한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무늬의 숨결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 뜨면 여늬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1. 서정적 화자는 슬프지 않다


송재학의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란 시는 감미롭다. 이 시의 첫 연에서 출발한 ‘만지네’가 ‘따라왔네’/‘막아주네’/‘따라간다네’/‘걸리네’/‘운다네’/‘발돋음하네’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의 무겁지 않은 어조 때문이다. 가령 ‘만지네’를 ‘만졌습니다’라든가 혹은 ‘따라왔네’를 ‘따라왔습니다’로 전부를 바꿔서 읽어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는다. 시인은 ‘소리 내지 않고 운다’고도 했다. 그것은 슬픔이 극에 달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죽음’과 ‘삶’의 경계 허물기


작가는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이라고 쓰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죽음’과 ‘밝음’이라 나뉘어 놓고는 ‘뒤섞이는’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정적 화자와 죽은 사람사이에는 이미 경계선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얘기다. 즉, ‘죽음’이 ‘밝음’이 될 수 있고 또 달리 말하자면 ‘밝음’이 ‘죽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여기서 굳이 ‘그’가 누군지는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작가만이 아는 비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유독 송재학은 ‘죽음’에 대해 끈질기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어느 한 순간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절규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죽음’과 ‘삶’의 경계선은 없으니까.

송재학의 <주전>이라는 작품에서도 경계의 모호함을 문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검은 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 때로 파도가 맞물리면서 신생의 거품을 떠밀거나 버려진 돌들을 이끌고 바다 깊이 담금질하며 주전의 검은 돌들은 더욱 맑아져 사람의 삶을 부추기고. 그때 검은빛은 심연의 입구이다 - <주전>의 일부


‘심연의 입구인 검은 빛’은 분명 죽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죽음은 통상적으로 검은빛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런데 이 시의 서두에서는 또 ‘검은빛은 환하다’라고 뒤엎고 있다. 밝음과 어둠은 시적자아에게 동일한 색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송재학의 작품에서는 이처럼 색채의 대비가 선명하면서도 불분명하다. 그는 분명 죽음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죽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검은빛은 흰빛이 될 수 있고 흰 빛은 검은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채의 분간이 잘 되질 않아서 혼돈을 일으킬 수도 있다. 투명함이 곧 불투명일 수 있고 뿌옇게 시야를 흐리는 것이 환하게 길을 밝히기도 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송재학의 <부음>도 주목해 보자.


죽은 자의 육체가 누런 봉투처럼 납작해졌다


육체란 이처럼 자유로울 때가 있어야 하는 법


갑작스런 부음이 내 귀에 혓바닥을 날름거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불온하게 속삭인다


각을 뜬다는 말은 짐승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장의차는 사각형, 금방 죽은 자에게서 떼어낸 깁스한 다리이다


내 몸의 옹이는 모두 닫히지 않는 문짝에 모여 있다


마치 해빙을 되풀이하며 추운 밤과 햇빛의 성질을 모두 간직해야 하는 생선의 육질 같아 자꾸 가렵다


내가 토악질을 한 가로수에서도 가지 부러진 곳을 제쳐두고 많은 옹이가 눈에 뜨인다


다른 나무가 건드린 물집이다


창문을 지나가는 덩굴이 멈칫거리는 건 너무 많은 불빛과 마주쳤던 탓인가 -<부음> 전문



박수연1)은 이 시에 대하여 죽음과 삶에 대한 경계선의 모호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죽음이 삶이고 부정이고 긍정이며 또한 그 반대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 비밀이다. 우선, 죽음과 삶의 경계, 경계란 접촉으로써 두 영역의 동시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시되는 것은 죽음의 진술 이후, 시의 4행에 이르러서이다. 죽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돌아보니 주체는 삶의 영역에 있는데, 그 영역이 죽음과 함께 있는 것이다.

3. 밝고 환하고 섬세한 이미지


‘홑치마 같은’ ‘풋잠’은 선잠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기서 ‘홑치마’는 흰색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홑치마’는 흰색에 가깝다. 어쩌면 그 무덤가에는 희디흰 치자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었을 것이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라도 좋을 듯하다. ‘술패랭이꽃’이 어여쁜 분홍색으로 피어서 휘파람을 불며 ‘저녁의 입구’를 막아주고 있으니.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순’이 나오고 ‘갯버들’이 쑤욱 고개를 내민다. 그렇다면 결국 이 시에서는 ‘흰색’으로부터 시작해서 ‘분홍색’으로 머물다가 다시 ‘연두빛’ 혹은 ‘옅은 초록색’의 대비로 마무리된다. 흰색은 ‘슬픔’을 상징할 수 있고 분홍색은 ‘따스함’을 그리고 마지막 연에 나오는 ‘초록빛’은 ‘희망’적임을 암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시인은 ‘죽음’이란 슬픔을 놓고 끝까지 ‘슬프다는’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홑치마’나 ‘치자향이 수로를 따라왔네’라는 구절을 보면 계절이 초여름쯤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홑치마’의 서늘한 이미지와 7월에 만개하는 ‘치자꽃’을 그려보면 이시의 계절을 만질 수 있다. 다섯 째 연에서 ‘술패랭이’ 또한 초여름에 만개하는 꽃이다. 무덤 가까이엔 ‘술패랭이꽃’이 피어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흰색의 ‘치자꽃’이 하얗게 피어서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무수한 꽃 위로 나비들의 난무. 화창한 여름날의 오후를 상상하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라고 했다. 그 길은 어떤 길일까. 아마도 나비의 날개 무늬는 현란하고 끝이 없을 것 같다. 그 가녀린 선은 형언하기 힘들 만큼 미세하고 정교할 것이다. 그렇게 서정적 화자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숲에 있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에서 우리는 ‘미리’라는 부사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이것은 이른 저녁을 암시해 주면서 동시에 밤을 예견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박수연의 평론집에서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이란 글이 던지는 메시지처럼 어차피 문학은 답이 명확치 않다. 시인 송재학은 유독 ‘죽음’이란 명제 앞에서 민감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유년시절의 영향을 전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얼음시집������은 어쩌면 그의 가문사를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 아버지의 죽음과 홀로 남게 된 어머니를 향한 안타까움. 집안을 돌보려면 배고픈 문학도보다는 ‘의대’쪽이 현실적으로 훨씬 전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향한 그의 열정은 ‘치과의사’가 된 이후에도 식을 줄 몰랐다. 어쩌면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등에 짊어지고 가슴속은 다른 상상으로 뛰었을 것이다. 문학을 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손님을 마다할 정도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쨌든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유년시절 외롭게 자랐을 것이다. 그런 모든 기억들이 오늘날 그의 작품세계에 깃듯 ‘죽음’과 ‘삶’을 낳게 하지 않았나하는 그런데도 그는 늘 따스하다. 힘겨웠던 기억들 혹은 아픔의 사금파리들이 그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도 그는 그것을 결코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껴안아 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만다. 기어코. 그는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많은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 죽음으로 인해 적잖이 슬퍼하며 자랐을 것이다. 그늘에서 자라는 이끼처럼 늘 습한 음지에서 세상을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는 ‘죽음’을 따스하게 안고 받아들이고 있다.


<참고문헌>

김양헌, ������푸줏간의 물고기������, 시선사, 2005.

말과 시간의 깊이 황현산 비평집 문학과 지성사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박수연 평론집 랜덤하우스중앙




'詩가 흐르는 상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대 아시나요 .... 이 외 수  (0) 2015.08.02
진달래꽃  (0) 2015.07.28
[스크랩] 시를 읽는다  (0) 2015.07.20
[스크랩] 전화 - 마종기  (0) 2015.07.15
유월의 언덕에서/김단혜  (0) 201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