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글 한편 썼다. 글제는 <나쁜 사마리아 사람>
신약성서 루카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대칭점에 있는 인간을 써내린 글이다.
물론 나도 위기의 이웃을 방치한 나쁜 사마리아 사람에 속한다. '착한'의 반대말은 '악한'이 되겠지만
나는 '나쁜'이라고 표현했다. 기실 인간은 철저히 악하지도 못한 측들이 더 많을 테니 '나쁜'이라 함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아래의 글귀를 읽었다.
방랑자 선언에서
“벗이여,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지금 그대는 위인들이 내는 요란한 소리에 귀먹고
소인배들이 휘두르는 가시에 긁히고 있다.
숲과 바위는 그대 곁에서 품위 있게 침묵하는 법을 안다.
다시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처럼 되어라.
바다 위로 가지를 드리운 채 말 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아름드리나무처럼 되어라.”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오르고 나면 자신이 더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시간을 두고 바뀐다.
우리는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알에서 깨어 난다.
사람들은 단번에 변하기를 꿈꾸지만 변화는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p 49)
우리가 세상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어쩌면 돌아오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 귀로가 없다면 우리는 여행이 아니라 끝없는 방황을 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방랑자에게 가장 힘든 시련은 어디로 돌아가야 할 지를 모르는 것이다.
(p 52)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면 사람들은 언제나 더 고독해진다.
경험한 것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p 56)
정착한 자와 방랑하는 자 가운데 어느 한쪽이옳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라갔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생각은 인생을 요약해준다.
결국 방랑자는 평생 그 마지막 여행길을 준비해온 셈이다.
(p 63)
“사람들과 관계를 많이 맺는다고 해서 득이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처럼 듭니다.
그런 관계는 잔바람만 일으킬 뿐 큰 바람으로 발전하지도 못합니다.
이로울 것 없는 무기력과 정체를 불러올 뿐이예요.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예의바른 끝없는 공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망에 빠진 소인보다는 외로운 거인이 되는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p 85)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말이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행동이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습관이 운명이 된다.
운명을 조심하라, 내세에 좃된다.
한 사람의 삶을 증명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남긴 작품? 작룸은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이룬 가족? 후손은 그를 잊을 것이다.
사랑? 사랑은 지나가 버린다.
그가 남긴 흔적? 시간은 그 흔적을 지운다.
내가 찾아낸 삶의 의미는 바로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인간의 조건을 따르는 것이다.
(p 90)
홀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지 않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바쁘게 지내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보내야 할지 아침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게 부러웠다.
바쁘게 지내면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는 놀라운 착각이 부러웠다.
현자와 방랑자, 예술가, 철학자를 제외하면 이 시대에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자가 누가 있는가?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간다.
(p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