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 화단에 작약 몇 송이가 만개해 있는 걸 보며 엘리가 무슨 꽃이냐고 묻는다.
"작약이야"했더니,
"자갸기?"한다.
나는 다시
"작약"하고 힘주어 말하며 꽃에 코를 대었다. 냄새가 나질 않았다. 얼마 전 북서울 숲에 핀 작약 향기는
미세하게나마 맡을 수가 있었는데, 이번 작약은 향이 미약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작약에 향기가 없을 리 없다.
5월이면 나의 모교 이화 교정엔 작약이 줄을 지어 피어 있었다. 연한 분홍과 미색이 어우러진 작약은 꽃송이도 탐스럽고 향도 그윽하였다.
나는 추억을 더듬어 향을 짐작할 뿐이다.
엘리가 묻는다.
"할머니, 그 꽃 향기 좋아요?"
"응 좋은 데, 할머닌 냄새를 못 맡겠어."
"그럼 제가 맡아 볼게요."
엘리는 고개를 숙여 꽃 내음을 맡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할머니, 냄새가 좋아요."한다. 이어 말하기를
"근데 할머닌 꽃 향기를 못 맡는 거야?"
"응, 어떤 건 맡을 수 있는데 어떤 냄새는 못 맡겠어. 할머니가 늙어서 코가 나빠졌나봐."
이 말을 할 때의 내 표정이 좀 쓸쓸하게 보였을까.
엘리가 대뜸 말을 받았다.
"할머니,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요. 난 할머니가 정말 좋아요. 요리도 잘하고, 친절하고, 개그맨 같잖아."
"정말 할머니를 지켜줄 거야?"
"응, 지켜줄 거야."
엘리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려는데 그만 콧마루가 꺾이듯 시큰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