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까던 남자를 읽고
김선유
‘언젠가부터 마늘을 까는 일은 그 남자의 몫이 되었다.’ 로 민혜의 수필 『마늘 까던 남자』는 시작된다. 퇴직한 그 남자와 화자의 이야기는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깊이가 있다.
‘아내를 도우는 남편의 이야기로구나.’ 하고 섣불리 판단했던 나는 후반부를 읽으며 ‘마늘 까주던 남자는 저 세상으로 가고 없다.’ 라는 구절에서 놀랐다. 구성법의 반전이 돋보였다.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의 이야기를 객관적 문장으로 담담하게 그려 내면서도 한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게 했다.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내면 아이를 볼 수 있는 화자였기에 퇴직한 그 남자의 쓸쓸함까지 보듬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의 삶이 마늘 맛처럼 아렸던 것은 생마늘 같은 아내 때문이었다고 화자는 자책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니 톡 쏘는 사이다 같은 아내가 그저 사랑스러웠을 그 남자가 떠오른다.
자가 치유제로서의 수필쓰기
정경아
누가 벗겨주기 전에 스스로 벗고 나서는 용기-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수필 쓰는 분들은 다 알 것이다. 무엇을 보여 줄 것인지 수없이 고민하면서 또 부끄러워하면서 그러면서도 벗는다. 아니 쓰고 또 쓴다. 왜? 아프니까. 누군가한테 말하고 위로받고 싶으니까. 아니 말하고 나면 스스로 위로가 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니까.
가슴 저 밑에 눌러두었던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꺼내보이는 자기 벗기기 작업. 혼자서 즐기는 고독한 독백놀이가 수필쓰기 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놀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얻는가? 또 독자에게는 무슨 메시지을 전달하려는가? 아마도 그건 ‘치유’ 요새 유행하는 낱말로 ‘힐링’이 아닐까. 그 자가 치료의 한 방법으로 우리는 글을 쓴다. 그것도 가장 사람냄새 나는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수필을 감히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은 상처를 받으면 가장 후미진 곳으로 찾아들어가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저 안의 상처가 아프면 혼자 웅크린다. 귀를 닫고 입을 닫고 온몸의 촉수는 아픈 곳에 집중된다. 세월이 시간이 약이되어줄때까지.
“마늘까던 남자”에서는 가장으로서의 남편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씁쓸해한다. 소 닭 보듯 퇴직하고 날개꺽인 남편을 좀더 따습게 안아주지 못한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을 반성하고 정직하고 예의바르게 애도한다. 그럴 수 있음은 이미 충분히 슬픔을 넘어섰다는 얘기다.
-생전에 그를 더 품어 주지 못한게 마늘즙으로 상처 문지르는 듯 하다-
“비아그라 두알”은 덤덤하게 귀찮아했던 남편의 부재 뒤에 알게 된 남자의 욕망에 대한 소회를 적은 글이다. 여자 곁에 이제는 없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화성남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글이다. 단조롭고 건조한 부부로 지낸 ‘완전한 엇박자 부부’그시간이 얼마나 부부의 생을 허비한 시간인지 너무 늦게 알아 안타깝다.
중년을 넘어 황혼으로 가는 부부의 삶이 얼마나 촉촉해야 하는지 서로에게 몰입하고 함몰되어 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작가의 늦은 후회가 읽힌다. 식욕은 곧 성욕이고 삶의 의욕이라 했는데 금성여자는 담담히 아주 담담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남편은 떠나고 없는데 작가는 아직도 여자로 살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무릇 생명지닌 모든 존재는 그 생명성으로 이렇듯 애처로운 가보다. 그 욕망의 간절함과 순수함이라니 명치가 당기듯 아프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이별이나 죽음을 외면하고 싶고 회피하고 싶어지는 감정이 상처인 것이다. 그 박탈감이나 상실은 삶을 포기하기가 차라리 쉬울 성 싶지만 어찌 싶기만 할 노릇인가. 이 아픔을 잘 처리하는게 자가 치유 작업이다. 그 한 방법으로 위 글을 쓰지 않았을까. 작가는 이글을 완성하는 동안 몸안의 통증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느닷없이 찾아든 사별이 관계하나를 잃는 일이지 자신의 존재전체를 뒤 흔들 일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채기 까지 오래 깊이 앓았을게다. 너무 아파서 너무 슬퍼서 감히 누군가에게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게다. 그런 지혜나 용기가 모든이게 있는 건 아니니까. 다행히 이 작가는 괜찮지 않지만 괜찮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그런 모습이 떠난 사람에 대한 더 깊은 사랑이거나 자신에 대한 존엄임을 또한 알고 있는 듯 여유만만하다. 참으로 담담하다.
‘그리움’이나 ‘그립다’는 단어를 한번도 쓰지 않았지만 사실 작가는 아주 많이 남편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만 그 상실감이나 부재에 발목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또다른 곳에 열정을 쏟는다. 지혜롭고 용감하다. 슬픔의 바닥을 치고 일어선 삶의 고수 이다. 그렇기에 더 애잔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내 마음 한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교적 언어의 비사교성 (0) | 2013.11.05 |
---|---|
용문산 낙엽지는 소리 (0) | 2013.11.03 |
[스크랩] 이성복 11월 (0) | 2013.10.26 |
산이 상을 주다 (0) | 2013.10.18 |
행복한 첼로 (0) | 2013.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