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태백산을 다녀왔다.
천제단으로 오르며 내가 중얼거린 말은,
여기가 바로 <신들의 겨울 정원>이구나!
더 이상의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그곳은 인간의 세상이 아닌 신들의 겨울 정원이었다.
하늘은 흐렸으나 밝은 잿빛이었고, 간간히 눈발도 나부꼈다.
주목 군락지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신의 손이 스쳐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신의 손길은 주목을 휘어지고 비틀리고 구불어지게 하여 뒤늦게 찾아간 내게도
신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는 은햬를 베풀어주었다.
천제단에 이르자 기온이 급강하 하면서 안개가 바람을 타고 신비롭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 안개 속엔 필시 신들이 거닐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신들은 지금 인간의 눈을 피하고저 바람과 안개를 풀어놓곤 지금 그 사이를 거닐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 신들이 바람과 안개의 형상으로 노닐고 있는 것이다.
벗었던 덧옷을 있는대로 껴입으며 추위와 맞섰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대덕데걱 얼어붙는 걸 눈으로 보며
나는 대자연의 장관에 압도된 채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얼마간 만 서 있으면 나도 곧 인간 상고대가 될 것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옷에선 이내 서리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목에 두른 머풀러에도 자잘하고 희부연한 꽃들이 수없이 피어났다.
콧물을 닦으려 꺼내든 물티슈는 금세 풀물 먹여 말린 헝겊조각처럼 굳어버렸다.
몇 년 전 겨울, 한라산을 찾아 갔을 때, 출발 시간이 조금 늦어 정상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성판악 코스는 지정된 시간 안에 진달래 밭(이름이 맞나?)을 통과해야만 등반을 허락하였는데
나는 그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조금 늦게서야 그 지점에 도착했다.
K 시인이 문제였다.
한라산을 몇 번씩이나 올랐노라며 나와 함께 등반을 해주겠다 자청한 제주 토박이 K시인은
카메라 맨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내 사진이나 찍어대더니결국 엄살을 부리며 그만 올랐으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를 그를 떼어 놓고 혼자 서라도 오르겠노라 했다. 하지만 결국 진달래 지점에서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태백산은 오르기가 아주 쉬운 산이었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지정된 등산로로만 간다면 위험성도 거의 없는 산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위엄과 장관을 보여주다니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