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친하다는 건 그의 모든 걸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친분을 쌓은 연륜만큼 상대가 주는 모종의 불편과 지겨움을 참아냈다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수용하고 받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떨어져 나갔을 그 상대가 여전히 나와 친분을 지속하고 있다는 건
나와 그가 서로 서로를 감싸며 참아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가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어떤 끈이 둘 사이에 존재해온 까닭인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상대방에 대한 속속들이가 더 훤히 들어난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나는 그예 대녀 O에게 입바른 소리 한 마디를 내지르고 말았다.
대화를 할 때 그녀는 종종 상대의 얘기를 끊고 박차고 들어 온다.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면 별 상관이 없겠으나 상대가 심각하거나 중요한 얘기를 할 때는
좀 기다리고 들어줘야 할 텐데, 그녀는 자기 가슴에 쌓인 사연이 많아선지 곧잘 이런 실수를 하곤 했다.
2년 전 겨울 내 친구 H와 대녀 O와 함께 정선 여행을 갔을 때 였다.
그 때 친구의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가슴 아픈 사연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젖어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얘기를 하고 있는데, O가 자기 얘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얘기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 며칠 후 H가 전화를 하여 이런 말을 해왔다.
"너, 그날 짜증나지 않았니?"
왜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옆에서 듣고 있으려니 나는 네 대녀가 참 짜증나더라. 니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네 얘기를 끊고 자기 얘기를 할수가 있니? 더구나 네 얘기가 막 클라이막스로 진입하고 있는데,,,
너는 그 날 그 얘기를 다 풀어놓아야 했어.그날 네 대녀는 시종 그렇더라. 나랑 자기랑은 초면인데도..."
한데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대녀 아들 덕에 중문 단지 롯데 호텔에 묶으며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 시간이었다.
복지원 원장 부부가 술파티를 벌인다기에 우리는 그들이 묶고 있는 옆 방으로 건너가 술을 마시며 얘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때 내 얘기가 한찬 진행되고 있는데 O가 또 내 말의 허리를 끊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번엔 내가 즉시 제지를 해버렸다.
"내 얘기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 방에서 1차 시간을 보내고 대녀와 우리 방으로 건너왔을 때 원장이 우리 방을 노크하며 할 얘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 자기네 방에선 남편이 울고 있다는 것이다. 사연이 궁금하여 그녀에게 까닭을 물었다.
그녀가 그 까닭을 막 펼치고 있는데, 이번에도 대녀가 다시 말을 잘랐다.
나는 왈칵 짜증이 치밀어,
"미안하지만 잠깐 스톰! 지금 O는 이 얘기를 끊으면 안돼. 상대방이 아주 중요한 애기를 하고 있는데 자기 애기를 하면 안되지.
생각해봐, 한 문장이나 문단이 끝나야 다음 문장을 잇는 게 아니겠어. 지금 한 문장이 끝나지 않았단 말야."
그러면서 정선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H가 정신과 의사이니 그녀의 말이라면 신뢰할 것 같았다.
그러자 대녀가 순순히 시인을 하며 자기는 그런 자기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버릇 말고도 얘기할 때 상대를 툭툭 치는 습관이 있다.
감정이 격할 때면 제법 아플 정도다.
이런 사소한 것도 나를 무척 짜증나게 하지만, 참아주는 것이다.
대녀 역시 내가 잘 모르는 나의 어떤 결점이나 불편함을 참아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편을 전혀 주지 않는 상대도 간혹 있는데, 겸허한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내 친구 H는 수십년 세월을 지내왔으면서도 내게 한번도 그런 류의 불편이나 짜증을 안겨주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무서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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