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루비를 먹는 저녁

tlsdkssk 2011. 12. 31. 19:59

마지막 날 저녁이 어째 쓸쓸하다.

외롭다는 의미는 아니고 마땅히 할 일도, 마음 둘 곳도 없다는 말이다.

유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기분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기분.

 

오전엔 K와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반주를 곁들여 안동찜닭을 점심으로 먹었다.

2시간 여 걷고 나니 어찌나 식욕이 동하는지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맛나게 먹었다.

늘 잡곡밥을 먹었기에  닭찜과 곁들인  쌀밥의 희고 부드러운 촉감이 거친 노동 뒤의 안식처럼 달았다.

집에 돌아와 대청소를 하고 싶었지만 몸이 노곤하여 자리에 누워 책을 보다가

H의 전화가오는 통에 30분여 수다를 떨었더니 어느 새 저녁.

날은 저물고, 배는 아직 부르고, 그렇다고 굶자니 섭섭하고, 거실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저녁 메뉴를 정하였다. 과일 몇조각과 견과류 , 그리고 무우를 먹기로 하자.

먼저 은행을 열 알 세어 후라이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볶았다.

열을 받아 벗겨진 겉껍질 사이로 투명한 연두 속살이 보석처럼 드러난다.

알맞게 잘 볶아져 잡색이 깃들지 않은 은행알은 페리도트 보석처럼 아릅답다.

이것저것 구색 맞춰 식사(?)를 끝 낸 뒤 후식으로 먹을 석류를 쪼개었다.

그 속엔 적당한 크기로 이미 세공되어진 루비 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석류는 생선의 알주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루비는 나의 탄생 달인 7월의 보석.

고온으로 가열시키면 초록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랬다가  냉각시키면 다시 원색을 찾는다는 신비한 보석이다.

루비를 한 알 한알 입에 넣고 톡톡 터지는 촉감을 즐기고 있으려니 

홀로 먹는 만찬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먹는 태도 역시 조금은 도도하고도 우아하게 먹어야 어울린다.

그 순간만큼은 로마의 귀족이라도 된듯 착각해도 좋다.

석류를 게걸스럽게 먹었다간 이내 흡혈귀처럼 입가에 피범벅이 되고 말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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